[고구려]우리 고구려 찾아가기
- 최초 등록일
- 2006.05.09
- 최종 저작일
- 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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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 고구려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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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하여 고구려가 중국이 아닌 우리 민족임을 증명하는 확고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각 민족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돌의 문화로 대변되는데 탑의 예를 든다면 우리나라는 돌탑, 중국은 벽돌탑, 일본은 나무탑으로 구별되는 식이다. 성곽도 우리나라는 돌성인데 비해 중국은 토성, 벽돌성 이다. 무덤도 우리나라는 돌무덤인데 중국은 흙무덤, 벽돌무덤이다. 흔히 무덤은 가장 변하지 않는 문화적 요소라고 한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묘제인 적성총을 연구해보면 그 묘제의 기원은 중국이 아니라 고조선과 맥족인 졸본 부여의 묘제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이 아닌 우리 민족의 역사였음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고조선의 뿌리를 이은 고구려란 국호는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 이전에 내려오던 ‘구려’라는 명칭에 자기의 성인 ‘고’를 붙여 ‘고구려’라 불렀다고 한다. ‘고’는 높음, 신성함 등을 의미하고 구려란 ‘구루’로 고을, 골 등을 의미하는 말로 고구려란 높은 나라, 신성한 나라 등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끊임없이 중국과의 투쟁 속에서 발전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군사강국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제국을 유지하는 근간은 효율적인 통치제도와 고유의 수준 높은 문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는 초기부터 여러 군소 국가를 병합하여 이룬 나라였다. 광활한 영토 내의 다양한 부족들을 다스리는 데 있어 좋은 통치제도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고구려는 신흥강국으로 나타났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역사상의 무수한 나라들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초기 고구려의 통치 집단 내에는 여러 정치 집단이 공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고구려의 5부족에는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순노부, 관노부 가 있었다. 그중 계루부의 집단이 다른 세력들을 나부로 편제하고 이들을 통제하면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 란 계곡이나 하천 유역에 마을들이 모여 여러 집단이 형성되고 이러한 지역 집단 내에 중심이 되는 마을의 규모가 점차 커져서 큰 촌락인 고을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벌판인 평야지대를 의미한다.
이 당시 왕과 각 제가는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가신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자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왕은 개별적인 나부 안의 일에 대해서는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초기 고구려의 정치 형태는 전체적으로는 왕이 주도하는 형태이지만 각 나부의 대표인 제가들이 함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제가평의회’ 라는 공동의 운영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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