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영천청제비
- 최초 등록일
- 2006.04.22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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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천청제비에 관한 비문과 역사적 의의.
목차
1.금석문과 탁본
-금석문과 6c 신라와의 관계
2.영천 청제비
1)청제(청못)
2)영천 청제비
ㄱ.건비 연도
ㄴ.크기
ㄷ.비문과 내용
ㄹ.특징
3.영천 청제비와 비문에 나타난 신라와의 관계
1)신라의 역역체제
2)신라의 중앙집권체제와 지방호족
3)신라의 수리시설과 벼농사
본문내용
청제비 병진명 비문의 반대편에는 정원명의 비문이 있는데 병진명의 비문과는 달리 상태가 아주 양호하여 글자를 거의 다 알아볼 수 있다.이 비문은 12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행은 4~12글자이고 글자간의 간격은 4~6cm이며 130글자로 이루어져 있다.1행부터 2행의 3번째 글자까지는 비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이다.우선 비문을 해석해보면 “정원14년 4월 13일에 청제를 수리하고 그 내용을 기록한다”로 볼 수 있다.여기에서 정원14년은 신라 원성왕14년(798)이며 4월 13일은 수리가 끝난 날로 볼 수 있다.2행 4번째 글자부터 3행 5번째 글자까지는 所內使에게 청제의 상태를 살펴보게 하는 내용이다.여기에서 所內使라는 글자는 관직명인거 같다.3행 6번째 글자부터 5행 3번째 글자까지는 수치의 규모에 대한 기록인데 해석해보면 못둑 길이는 35보,못둑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는 6보 3척,배수관까지는 12보이다.5행 4번째 글자부터 6행 8번째 글자까지는 공사기간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해보면 “이와 같이 하기를 2월 12일에 시작하여 4월 13일에 이르는 동안에 수치하였다”는 뜻이 된다.6행 9번째 글자부터 9행까지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에 대한 기록이다.우선 斧尺은 도끼를 사용하는 기술자이며 法功夫는 국가에 소속된 일꾼들인거 같다.이를 토대로 해석해보면 “합하여서 斧尺이 136명이고 法功夫가 14,140명이며 2군에서 ⏏명이 동원되었다.”로 볼 수 있다.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을 가질수 있는데 동원된 인력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병진년에 청제를 축조할 당시에 동원된 인원이 7000명에 불과한데 청제를 수리하는데 배가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조금 의아스럽다.청제의 수치는 아마 빈민 구제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다.당시 유난히 재해가 많았었는데 이에 국가에서 2월에서 4월에 이르는 보리고개 시기에 빈민 구제의 목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청제 수치를 한게 아닌가 한다.끝으로 비문의 마지막 부분은 공사의 책임자의 이름들이 나와있다.
참고 자료
1.[금석문과 신라사]/주보돈/지식산업사/2002
2.[영천청제비 병진명의 축조연대]/김창호/경주대학교/논문집1998년(제10집)
3.[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김태식/김영사/2001
4.[답사여행의길잡이8-팔공산 자락]/한국문화유산답사회/돌베개/1994-2002
5.[영천청제비를 통해 본 청제의 축조와 수치]/이우태/사학논총/1985년
6.[신라 통일기의 왕실 직할지와 군현제]中청제비 정원명의 力役운영 사례 분석/하일식/동방학지/1997년 9월 (제97집)
7.[삼국 및 통일신라 체제의 연구]/김기흥/역사비평사/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