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고려 후기의 역사 서술 -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비교 -
- 최초 등록일
- 2006.04.06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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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사서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비교를 통해
살펴본 고려 후기의 역사서술!!
목차
Ⅰ. 서 론
Ⅱ.『三國遺事』
Ⅲ.『帝王韻紀』
Ⅳ.『三國遺事』와『帝王韻紀』의 비교 검토
Ⅴ. 결 론
< 참고문헌 >
본문내용
역사는 시대의 것이며, 역사 기록은 인간 의식의 것이다. 역사서는 특정 시대와 특정 의식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여기서 검토하고자 하는 역사서, 『三國遺事』와 『帝王韻紀』도 一然과 李承休의 것이며, 고려 후기의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들과 유지된 현재의 간격이 상당히 멀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을 조명하고자 나선 이유는 간격을 넘어 존재하는 사라지지 않을 가치에 대한 관찰과 고민을 위함이다.
一然은 승려였고, 李承休는 유학자였다. 대신 『三國遺事』와 『帝王韻紀』는 공히 13세기 후반의 것이다.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인간 의식이 시대를 어떻게 역사 기록으로 담아내며, ‘특정’과 결부될 때 그 의식은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관찰해보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우선 두 역사서에 한 장씩의 공간을 분할하여 두 역사가의 의식을 관통하는 시대와 역사 기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사가의 시대 속에서 삶과 의식을 연결시키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서의 편찬 배경과 동기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 다음으로 각 역사서의 구성과 내용을 살피고 그 가치를 파악할 것이다. 끝으로, 두 역사서를 한 장에서 비교 검토하여 같은 시대에 쓰여진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三國遺事』와 『帝王韻紀』가 어떻게 다른 역사 기록으로 표상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一然의 생애와 『三國遺事』의 편찬
「高麗國華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銘幷序」에 의하면 「高麗國華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銘幷序」의 전문은 韓國精神文化硏究院編 『譯註 三國遺事』의 219-237쪽을 참고했다.
一然은 1209년 출생했다. 1218년 海陽 無量寺에서 취학하고, 1219년 陳田長老 大雄에게 나가 剃髮하고 得度하여 具足戒를 받았다. 이후 추대를 통해 9山門의 4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227년 겨울에 選佛場에 나가 上上科에 올랐다. 그후 包山의 寶幢庵에 머물러 마음을 선관에 두었다. 1236년 가을, 蒙古兵의 병란時에 문수가 현신하여 전한 바대로 無住 妙門庵에 거쳐하던 중 參究후 득도하여 나라로부터 三重大師에 제수되었다. 1249년에 鄭晏의 초청으로 定林寺에 주재하였다. 1256년 禪師의 직을 더했으며 1259년에는 大禪師를 더했다. 1261년 元宗의 명으로 서울로 올라가 禪月寺에 주석하여 堂을 열고 牧牛和尙 知訥의 법을 이었다. 1264년 南으로 돌아가기를 거듭 청하여 迎日 吾魚社에 머물렀다. 곧 仁弘社主 萬恢가 주석을 사양하면서 수많은 學侶를 모으고, 1268년 朝旨로 大藏落成會를 雲海寺에서 베푸는데 主盟을 맡았다. 仁弘社 주재 11년에 ‘仁興’을 조정으로부터 賜額받고, 包山 동쪽의 涌泉寺를 중수하여 佛日社로 삼았다.
참고 자료
채상식, 1996, 「일연과 『삼국유사』」『한국사 21-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柳璟俄, 1996, 「『제왕운기』의 편찬」『한국사 21-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변동명, 2000, 「이승휴」『한국사시민강좌』27, 일조각.
權熹耕, 2000, 「三國遺事를 통해 본 高麗的 시각」『書誌學硏究』20, 書誌學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