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단재 신채호
- 최초 등록일
- 2005.12.15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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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압박을 점점 힘들어 지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1910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의 점점 심해지는 책동에 대하여 대응책을 논의하는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신민회는 어려워진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을 접고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구체적 사업으로는 서북간도를 비롯한 시베리아, 미주 등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나아가 이들 지역에 동포들을 이주시켜 항일의 근거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1910년 4월 8일 단재는 일단 국내를 빠져나가 중국 청도에서 만나자는 계획에 따라 안정복의 `동사강목`만을 들고 김지간과 국경을 넘어 신민회 회의가 열리는 청도로 갔다.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할 중대한 회의였던 청도 회의는 독립운동에 대한 점진론과 급진론이 대두된 회의였고, 따라서 여러 대안이 치열하게 맞선 회의였다.
목차
1. 단재 신채호 선생의 가계
2. 단재 신채호 선생의 탄생과 성장과정의 모습
3. 독립운동의 시작과 국내의 독립운동
4. 활발한 독립운동의 길
5. 국외에서의 활동과 순국
6. 단재 신채호 선생의 선택 동기와 배울점
7. 단재 신채호의 연보
본문내용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령 신씨로, 시조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와 군기감의 벼슬을 지낸 신성용이다. 그 윗사람들은 신라의 공족(公族)으로 여러 대에 걸쳐 고령에 살면서 호장(戶長)을 지내 왔기 때문에 고령 신씨로 계승되어 왔다.
단재는 시조로부터는 26세 손이 되고, 조선조에 영의정까지 지낸 신숙주에게는 18대 손이 된다.
고령 신씨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상당산 동쪽에 살았으므로 산동 대가로서 지칭되어왔으며, 낭성서 대과급제 24명, 진사 80여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재의 직계는 높은 벼슬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의 16대조부터 12대조까지는 종 3품에서 종 6품에 이르는 벼슬에 있었으나 11대조부터 9대조까지는 족보상에조차 벼슬이 보이지 않으며, 8대조부터 6대조까지는 일시 벼슬이 주어지는 것 같다가 5대조부터는 다시 그 증직되는 벼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락하였다. 단지 조부 신성우가 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의 정언의 벼슬을 거치고 있을 뿐이다.
단재 집안의 몰락에는 이인좌의 난과 관련되어있다. 이 난의 관계자중 신천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단재의 직계는 아니고, 신숙주의 5대손인 신식의 5대손 이라고 한다. 신식의 외손에 소현세자가 있는데 신식의 5대손인 신천영은 이인좌와 모의하여 반란을 꾀하고는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추대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식의 가문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리고 이 여파는 낭성 일대에 미쳐, 단재의 5대조 신두모 등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급속하게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원군의 집정기간동안 단재의 할아버지인 신성우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 6품 벼슬인 정언을 지냈을 뿐이다.
신성우의 벼슬길 이후에도 단재의 집안은 피지 못하여 그의 낙향과 함께 집안사정은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신성우는 처가가 있는 안동 권씨 마을로 외동아들인 신광식을 보내어 외가살이를 시키게 된다.
단재의 아버지 신광식은 가난한 시골 선비로, 본래 살던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을 떠나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마을 외가댁 옆에 간신히 묘막을 얻어 살아야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