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김유신 묘
- 최초 등록일
- 2005.12.04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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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유신 묘를 답사 후 묘의 형식과 부장유물 그리고 연대와 그 역사적 문화적 성격에 대한 생각을 정리
목차
1. 김유신 묘
2. 형식
3. 부장유물
4. 연대와 그 역사적 문화적 성격
본문내용
김유신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신라의 명장으로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15세 때 화랑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닦았다. 학문이 깊고 무예가 뛰어난 그는 신라의 오랜 꿈인 삼국통일을 위해 의지를 키워나갔다. 한 때 천관이라는 기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깊이 반성한 김유신은 자신을 태운 말이 술집 문앞에 가서 멈추자 말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와 같은 결단성은 훗날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654년 진덕 여왕이 왕위를 이을 자식 없이 죽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상대등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다. 그 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고구려 정복 후 당나라가 신라마저도 정복하려 하자, 김유신은 망한 고구려 백제군과 연합하여 이를 물리침으로써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김유신은 673년(문무왕 1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 김유신 묘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신라의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무덤.
사적 제21호. 송화산(松花山) 자락이 동으로 뻗어내린 구릉 위에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그가 죽은 뒤 문무왕은 채백(彩帛) 1,000필, 조(租)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어 장사지내게 했다. 또 비를 세워 공적을 새기며 사람을 배정해 무덤을 수호하게 했다. 뒤에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한 것으로 보아 무덤의 양식이 왕릉이나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2. 형식
굴식돌방무덤(토총 횡혈식석실고분)
묘의 모양은 원형 봉토분이고 봉분의 지름은 약 30m 이며 둘레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을 두르고 호석 중간에는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고 호석 밖에는 여러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만들었으며 호석와 난간 사이 바닥에는 돌을 깔았습니다. 위에 봉분이 있고 밑에 돌난간이 있는 형식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