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과]조어도
- 최초 등록일
- 2005.11.15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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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중간의 대립문제인 조어도에 관한 레포트이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조어도란?
2. 조어도 영유권 분쟁의 배경 및 발단
3. 조어도 영유권에 대한 중국, 일본, 대만의 주장
4. 조어도의 가치와 조어도 영유권 분쟁의 진행상태
5. 향후전망
6. 한국에 미치는 파장 및 우리의 대응방안
Ⅲ. 결론
본문내용
1879년 유구(流球)왕국은 일본에 의하여 강점(强占)되고 오끼나와 현(縣)으로 편입되었다. 1884년 오끼나와 현감(縣監)은 조어도(釣魚島)를 오끼나와 현(縣)에 편입시키고 그 섬에 경계표지를 세울 것을 일본 중앙정부에 건의하였으나, 그 섬들이 중국에 더욱 인접(隣接)해 있다는 이유로 일본 중앙정부는 이를 보류시켰다. 1890년에 오끼나와 현으로부터의 건의가 재차 있었으나 역시 일본 중앙정부는 이를 인가하지 않았다. 1895년에 세 번째의 건의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그간 상황의 변화 등을 참작하여 이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1895년 1월 14일 각의(閣議)의 결정으로 조어도(釣魚島)를 오끼나와 현(縣)에 편입시키고 경계표지를 세울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의 상황은 1894년 6월, 한국에서 발발한 청일전쟁에 일본은 승승장구(乘勝長驅) 우세한 전세(戰勢)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이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은 승리하여 1895년 4월 15일 시모노세끼 조약(下關條約)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는 대만과 그 인접하거나 부속된 제 도서 등을 일본에 양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조어도(釣魚島)는 대만(臺灣)에 부속되어 인접한 도서이므로 이로서 이 섬은 일본이 영유(領有)하는 섬이 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1896년 9월, 고하진사랑(古賀辰四郞)는 민간인에게 이 섬들을 30년간 무상(無償)으로 대여(貸與)하였다. 1918년 그가 죽자 그의 아들이 사업을 상속받아 계속하였다. 그는 이 섬을 기지(基地)로 건삼치 생산과 갈매기 박제(剝製) 및 재목(材木) 채취 등 사업을 벌였다. 1926년 무상대여 기간이 종료되자 아들은 1932년에 이 섬을 유상(有償) 불하(拂下)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개발사업은 2차 대전의 발발로 모두 포기되었다.
2차대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降伏)으로 종료되었다. 즉 일본은 1943년 Cairo 선언의 조항을 무조건 수인(受認)한 것이다. 1943년 Cairo 선언(宣言)에서는,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대전 이 시작된 이래 장악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그들로부터 박탈하고 만주(滿洲), 대만(臺灣) 및 팽호도(澎湖島) 등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절취(竊取)한 모든 영토를 중화민국에 복귀시킴에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 자료
․ 신용하, 한국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논쟁 (한양대학교출판부, 2003)
․ 김종두, 동아시아 해양분쟁, (문영사, 1997)
․ 이토 요시아키, 한눈에 보는 세계 분쟁 지도 (해나무, 2003)
․ 박종귀, 아시아의 분쟁 (새로운 사람들, 203)
․ 배진수, 세계의 도서분쟁과 독도 시나리오 (한국군사문제연구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