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사화이후의 사림의 동향
- 최초 등록일
- 2005.10.28
- 최종 저작일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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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화이후 즉 16세기 이후의 사림의 동향과 사림과 향촌사회의 연결에 대해
서술하였습니다. 사화이후 유향소의 복립운동과 서원의 역할도 포함되어있습니다.
목차
Ⅰ. 사화 이후의 사림의 동향
1. 16세기 말 사림의 집권
2. 17세기 전반(前半)의 사림의 활동
Ⅱ. 유향소(留鄕所) 복립(復立) 논의
Ⅲ. 서원의 역할(役割)
1. 16세기 서원의 역할과 향촌사회
2. 17세기 전반의 향촌과 중앙의 연결
본문내용
明宗初의 혹심한 사화로 크게 위축되어 있던 사림세력은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윤원형을 견제하려 한 명종과, 그리고 같은 외척이면서도 운씨일가와 대립관계를 보이던 심씨(沈氏)일가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명종 10년경부터 다시 조금씩 정계에 발을 내 딛게 된다. 이후 명종 15~16년경에 이르면 당시의 權臣 이량(李樑)의 전천(專擅)을 견제할 정도로 성장하였으며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사림세력은 권신 윤원형을 집중적으로 탄핵, 일거에 척신(戚臣)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비록 사림계의 핵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릉경(李凌慶)등의 사림출신 관료가 명종비 심씨를 움직여 명종의 후계자로 선조를 옹립(擁立)함에 미처 정세는 사림계에 크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영남과 호남*기호지역의 퇴계*하서*김인후*화담 서경덕*남명 조식 등 거유(鉅儒)의 문인들이 신진사류로서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으며 선조 5~6년경을 지나면서 그 영수(領袖)이던 박순이 상신의 지위에 오르고 노수신(盧守愼)이 이조판서로서 인사권을 장악함에 미처 사림의 집권이 실현을 보게 된다. 이에 따라 구체제적요소의 청산이 당면과제가 되어 훈척계 인물과 그들의 행적(行蹟)에 대한 비판과 탄핵이 일어나며 한편으로는 사림의 집권을 합리화하고 그 도학(道學)적 정통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구체제의 청산은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다. 명종 년간에 진출할 수 있었던 사림계 관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훈척세력, 특히 명종 외척이던 심씨 일족의 은덕을 입고 있어서 외척을 일체 배격하는 급진적인 신진사류의 주장에 동조할 수만은 없었다. 이조전랑자리를 놓고 벌어진 외척 심의겸과 신진사류의 대표격 이던 김효원의 갈등과 분쟁이, 동 서인으로 분당을 가져오게 하였던 배경이 이것이다.
한편 사림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은 기묘*을사사화에 대한 번안(飜案)과 그 피죄인(被罪人)에 대한 신원(伸寃) 및 가해측에 대한 추죄(追罪)로서 시작되었다.
참고 자료
o「조선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한국사28, 국사편찬위원회, 1996
o 정만조, 「조선조 서원의 정치*사회적 역할」-사림활동의 전개와 관련하여-
한국사학1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o 이태진, 「사림파의 유향소 복립운동 上, 下」, 진단학보34, 35, 1973~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