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역사]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의의
- 최초 등록일
- 2005.10.21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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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의의에 대해 알아본 레포트
목차
1. 머리말
2. 교조신원운동
3. 제 1차 동학농민운동
4. 제 2차 동학농민운동
5. 동학농민운동의 의의
본문내용
1892년 동학교단 지도부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동학이 하나의 사설이 아닌 보국안민의 종교로서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무엇보다도 교조에 대한 무구한 죄명을 씻어 한 교단의 교조로서 권위를 회복하여 포교의 자유를 차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892년 10월 서인주와 서병학 등은 공주에서 각지의 동학교도들을 불러 모아 집회를 열고 각 읍의 수령들이 동학교도들을 침학하고 재물을 빼앗는 일이 자행되고 있으니 이를 금단해줄 것을 요청하는 ‘의송단자(議送單子)’를 올려 감사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비록 동학의 포교․공인을 조정에 계달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였지만 각 읍에 동학금단의 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각종 폐단을 일체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고무되어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에서 동학교단 지도부가 직접 참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 이 삼례집회에는 동학교단 지도부의 독려에 따라 전라도․충청도 일대 동학교도 수천여 명이 모여 20일이 넘도록 집단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리하여 동학교단은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으로부터 동학교도에 대한 부당한 수탈을 금하도록 조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단순한 신원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삼례의 모임은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것은 성패에 관계없이 이를 계기로 하여 동학사상 최초의 정치집회를 가능케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으로 동학의 지도층은 하나의 종교로서의 잠재력과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 지방의 감사를 상대로 해서는 안 되며, 국왕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삼례집회가 해산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상경투쟁계획에 대해 논의되었다. 상소를 준비하기 위한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청주군 성산리 손천민가에 설치하고 소수에는 박광호를 임명하였다. 준비를 마친 이들은 2월 8일 과거보러 가는 선비로 가장하고 일제히 상경하였다. 때는 마침 세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과거가 열릴 예정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