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순신의 연전연승 이유
- 최초 등록일
- 2005.10.09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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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 레포트는 제가 이순신관련 자료를 모으면서 쓴 것으로, 이순신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해서 나름대로 조선왕조 실록과 논문, 책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이유를 나름대로 노력하여 분석한 결과입니다.
목차
1. 이순신 소개
2.이순신이 전쟁에 참가한 결과 분석
3.이순신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원인 분석
1) 배
2) 무기
3) 준비와 전술
4. 임란 당시 우리나라 배와 일본배의 비교
본문내용
♠ 난세에 핀 꽃 이순신?
이순신은 이정의 네 아들 중 셋째이며,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 났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로부터 내려오는 문반 가문으로 순신은 그의 12대 손이 된다. 순신은 집안이 가난하여 집을 어머니의 친정인 충남 아산 백암리로 옮기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고향처럼 되어 버렸다.
아산 고을로 낙향한 순신은 어릴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함께 전쟁놀이를 즐겼다 한다. 순신의 조카 이분 (맏형 희신의 둘째 아들)이 지은 충무공 행록에 따르면, 어릴 적에 뭇 아이들과 더불어 놀면서도 마냥 전쟁하는 놀이를 즐겼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순신을 대장으로 올려 세우더라는 것이다.
훗날 유성룡이 이순신을 『장수될 재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조정에 추천했던 것만 보아도, 두 사람이 같은 동네에서 소년시절부터 사귀기도 했었겠지만 그 보다도 순신이 무예를 닦기 시작한 20대 이후에 더욱 더 충무공을 아껴 주었던 것이다.
순신은 22세 때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던 해 가을에 훈련원의 별과시험(무과)에 응시했다. 충무공은 시험장에서 말을 달리다가 불행히 말이 거꾸러지면서 같이 쓰러져 왼쪽 다리뼈가 절골이 되었지만, 한 발로 일어나 버들가지를 꺾어 상처를 싸매고 시험장을 나왔다.
이로부터 4년 후, 그의 나이 32세 되던 해의 봄에 식년무과 시험이 열렸다. 이것은 지난 번의 별과시험과는 달리 4년마다 열리는 국가의 정식 시험이었다. 이 시험에 응시한 순신이 무예시험을 끝내고 무경 강독시험에 임했을 때, 연대까지 외워가며, 명답을 내림으로써 시험관들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관직에 나아간 이순신은, 순탄치 못한 관직생활 끝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하였고, 1592년 5월 4일 처음으로 일본군과 옥포에서 맞서 싸웠다. 1594년부터 약 3년은 명과 일본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고, 이순신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 보장, 산업 장려 등에 주력하며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했다. 그러던 중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하게 되면서 이순신이 맡았던 삼도 수군 통제사는 원균이 맡게 되었는데, 원균의 전사로 다시금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르게 된 순신은 수군 병력 120명에 함대 12척을 이끌로 명량해협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승리하였고, 그 이후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일본과 맞써 싸우다 1598년 11월에 노량에서 전사한다.
참고 자료
김 현 기. [전술적 측면에서 본 이순신 사상]. 경기대 정치대학원
김 철 환. [무기체계 발전과정에서 거북선의 위상]. 국방 대학교
이 순 신. 새번역 난중일기. 최두환 번역. 학민사
박 영 규. 조선왕조 실록. 들녘
김 재 근. 거북선. 1992년. 정우사
국립 진주 박물관 .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 혜안
남 천 우 .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미다스북스
이 선 호. 이순신의 리더십. 팔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