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고통의문제가 유신론적 입장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가
- 최초 등록일
- 2005.09.02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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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통의 문제가 왜 서양 유신론적 입장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3장정도로 기술한 것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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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에 대한 의존이라던가, 문화에서의 침투는 서양이 훨씬 두드러진다. 서양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중 특히 로마시대에 유입된 크리스트교와 예수라는 존재는 더했다. 로마에 크리스트교가 들어옴으로 인해 상류층까지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후 동․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당시 유입된 게르만족과 훈족, 갈리아족등 다양한 종족들이 유럽 판도를 휘저어 다녔고 이를 처음으로 통일한 프랑크왕국은 통일된 왕국의 구심점으로 종교, 즉 크리스트교를 지목했다.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프랑크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는 직접 세례를 받으러 갈 정도로 자신의 권력의 후원자로서 크리스트교를 지목했고 이는 중세사회로 진입하는데 하나의 충격이었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고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하에서도 굳건히 중세사회는 크리스트교를 하나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고, 이의 표준인간을 예수로 삼으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자신들의 문화를 이에 맞추어 발전시켜 나갔다. 그 예로 중세 유럽사회에 있던 도시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서양 중세의 도시 구조를 보게 되면 도로가 주변의 큰 도시들을 향해 십자 모양으로 되어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주위는 해자라던지, 영주의 성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예전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신전이 있으며, 근․현대로 들어서며 시장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장소의 실재적․상징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이런 생활 패턴 속에서 고통의 문제는 하나의 부수적인데 지나지 않았다. 교회의 상징성이라고 하는 고딕양식,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당했던 ‘카노사의 굴욕’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점차 중세장원에서 도시로 이행하 나가는 과정, 그리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시기에 있어서 인문주의가 판을 치는 상황에 있어서도 교회의 권위, 교황의 권위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며, 교황의 ‘파문’이라는 선고는 곧 죽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의 이러한 관습은 근․현대로 오며 상당히 미미해졌지만 크리스트교의 관습은 그대로 남아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시대의 서양세력의 총․칼과 함께 아프리카․아시아등으로 급속히 유입되었고, 결국 유신론적 입장의 대표라고 해도 무방한 크리스트교의 교리가 문화 속으로 파급되며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는 파급지역에 존재하던 기복신앙과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며 고통의 문제에 있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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