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4.3사건] 제주도 4.3사건
- 최초 등록일
- 2005.06.21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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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제주도4.3사건
2.나의생각
본문내용
1948년 4월 3일 미군정 치하에 있던 제주도의 전지역에 걸쳐 일어났던 무장봉기로 8․15 광복 이후 좌우익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을 때, 제주도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세력들이 지하조직을 통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한편 미군정의 지지를 받은 우파 세력이 강화되자, 사회주의자들과 이들 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제주도에서의 이런 갈등은 47년 3․1절 기념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에게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심화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제주도에서 활약하던 공산 남로당파의 사주에 말려든 순수 민간인과 미군정 및 우파 세력 사이에 생겨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갈등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의하여 증폭되었고, 이에 제주도민들이 48년 4월 3일을 기하여 일제히 봉기하였다. 공산 좌익계는 이 봉기에 편승하여 선동적 구호를 외쳤다. 미군정 경찰은 사태 수습이 어려워지자 군을 투입시켜 진압하였다. 그 결과 27만 명의 도민들 중 무고한 사람을 포함하여 약 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49년 봄에 종결되었다.
이러한 4․3 사건은 해방 정국하의 통일조국건설운동이다. 그리고 미완의 해방을 진정한 해방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민족해방운동이다. 이와 같은 성격은ꡐ단독정부 수립 반대ꡑ라는 봉기 목적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 도식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지도부를 제외한 대다수 일반 민중들이 실제 이처럼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과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세련된 정치의식은 갖지 못했을지라도 생활 속에서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롭다는 것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즉 항쟁 지도부는 외세로부터의 해방과 통일조국건설만이 민중의 고통을 더는 지름길임을 제시했고 민중은 이들을 믿고 따랐던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