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 존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 최초 등록일
- 2005.06.06
- 최종 저작일
- 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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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지는 미국 일리노이 주의 시골 도시 골콘다에서 태어나 일리노이 농장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정규 육사 출신은 아니였고, 24세때 고등사관양성소에 입학, 직업 군인으로서 첫발을 디든 뒤, 태평양전쟁 당시 여러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해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4군단 사령관으로 오키나와 전투에도 참가한 하지는 일본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9일 미 육군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서울을 점령한 뒤 하지는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인 각 정당 대표들을 초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지도자들과의 첫 공식 만남에서 독립과 정부수립 문제에 대해서는 카이로 선언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장래의 일로 넘기고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였다. 하지가 조선문제의 정치적 해결 방안에 대해 상부로부터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침을 전달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당 대표자들과의 첫 만남이나 첫 기자회견 석상에서 구체적인 방침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미국측은 신탁통치 실시 이전에 한국에 적용될 정치. 경제적 방침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고 맥아더와 하지에게 <SWNCC 176/8 ; 한국의 미군 점령지역 내 민간 행정에 관해 미 육군 태평양지구 사령관에게 주는 초기 기본지령>을 전달하였다. 전체적으로 <기본지령>은 한국의 일본으로부터의 분리와 점진적인 독립 획득이라는 목표를 제시하였고, 일본군의 항복 접수 이후 군정이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항과 임무를 제시하였다. 미군이 진주하여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정부의 형태를 가진 국내의 ‘조선인민공화국’,해외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처리였다. 미국정부는 임정에 대해서는 해방이전부터 불승인정책을 취했으나 중앙의 활동력이나 지방에서 인민위원회 조직의 광범한 존재, 일본 항복 후의 진공기에 중앙이나 지방에서 보여 주었던 자치의 경험 등은 이들의 실체를 부정해 버릴수 없는 증거였다.
참고 자료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