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의 중국 인식
- 최초 등록일
- 2005.05.08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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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일본 유학과 갑신정변기
2) 중국 유학과 기독교의 수용
3) 미국 유학기
4) 청일전쟁
5) 갑오개혁
6) 맺음말
본문내용
1) 일본 유학과 갑신정변기
일본 유학과 대인관계
윤치호의 일본 유학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1880년부터 본격화된 조선의 개화정책은 통리기무아문이란 신식 정부기관이 들어서고 1881년 일본과 청국에 시찰단을 보내게 된다. 3개월간의 일본국정 시찰 후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등 어윤중의 수행원들은 전원 일본에 남아 유학하게 되고 윤치호는 동인사에 입학하여 일본어와 영어등 외국어에 전념한다. 윤치호가 일본어와 영어에 열중한 것은 외국어가 신문명, 서양문명을 수입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유학기동안 윤치호는 당시 일본에 체재중이던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민영익등 조선개화당과 친분을 두텁게 하였는데 당시의 영향으로 윤치호는 귀국후 개화당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또한 외교방면에 관심을 가졌던 윤치호는 세계 각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국제교류를 활발하게 추진하는 일본의 적극적 외교를 보고 개항 이후에도 여전히 청국과의 사대 관계를 단절치 못하는 조국의 현실에 몹시 안타까워했다.
갑신정변과 그 결과
대외적인 자주독립과 대내적 개화자강을 국정개혁의 이상으로 삼던 윤치호는 개화당의 문명독립적 사고에 감응하여 자신과 동일한 이상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옥균, 박영효등이 국정개혁의 이상을 급속히 실현하기 위해 정변의 방법을 선택했음을 알았을 때 그는 그의 부친인 윤웅렬과 함께 급진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김옥균을 찾아가 “개화당은 마땅히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12월 4일 갑신정변이 발발하고 청국군에 의해 3일만에 허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정변 후 윤치호 부자는 거사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화당과의 친분에 의해 난처한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비록 고종은 “나는 너희 부자가 죄 없음을 알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하였지만 당시 세인들은 윤치호 부자를 남겨두면 필시 다시금 내란을 일으킨다하여 비록 신변에 위협은 없었으나 윤치호는 상해로의 망명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