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수원성 답사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05.04.11
- 최종 저작일
- 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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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원성을 다녀와서 작성한 보고서 입니다
목차
개요
화성 일주
화성의 사대문(四大門)
곳곳에 스민 조상의 숨결
화성의 특징
화성 복원 사업 그러나 지금은...
본문내용
원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華山)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조선 정조가 1789년(정조13년) 그의 생부인 장헌세자(우리가 흔히 ‘사도세자’라고 부르는 정조의 아버지이다.)의 묘소인 현륭원(후에 ‘隆陵’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와 민가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부왕인 부친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 천도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준공되었다. 김동욱, 「수원성」, 대원사, 1990
작년 1996년은 화성 축성 2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체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커다란 찬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화성은 드디어 지난 5월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록이 확정되었다.
화성 관리 사무소에서 나누어준 「화성 안내문」이라는 조그마한 팸플릿에 의하면 화성은 성곽의 전체길이가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서쪽으로 화서문, 남쪽으로 팔달문, 북쪽으로 장안문 등 4대문을 내고 암문 4개, 수문 2개, 적대 4개, 공심돈 3개, 봉돈 1개, 포루 5개, 장대 2개, 각루 4개, 포루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있게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을 지어 부친의 릉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행궁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현재 복구 공사 중이다. 또한 다른 시설물 중에서도 성곽의 많은 부분이 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퇴락되고 제반 구조물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6.25동란을 통해 문루가 파손되어 있었다가 1975년부터 3년간 복원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시가지가 성터 일부를 점하고 있어서 팔달문에서 동남각루까지의 450mm 구간과 행궁은 시가지의 형편상 복원하지 못했다고 하니 안타깝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