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문학문화] 최치원
- 최초 등록일
- 2005.01.01
- 최종 저작일
- 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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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가계 및 유년시절
2. 당나라에서의 시작(詩作) 활동
3. 귀국후의 활동
4. 시국관
5. 사회개혁 활동
6. 은거생활
7. 고려건국을 즈음한 태도
8. 학문적 입장
9. 역사인식
10. 한문학·불교업적
11. 도교 노장 풍수지리연구
12. 평가
13. 저술
본문내용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가 송악(松岳)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하는 데 비하여,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하여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 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 자료
한국사상논문선집 26권. 불함문화사. 1998.
인터넷 cont2.edunet4u.net/%7Edanti2/k8/hanjakpum/gou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