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태종의업적
- 최초 등록일
- 2004.11.07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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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ㅋㅋ
목차
1.서론
2.본론
3.결론
본문내용
태종 이방원은 정치 및 군사제도 등에 대한 대폭적인 개혁에 착수하고 이를 강력히 집행함으로써 중앙집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장악하였고 신권을 대변하던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신설하였다. 아울러 행정 실무를 맡아보는 육조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육조에서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밖에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국가 재정의 기반을 마련하고 호패법, 신문고제도 등을 실시하여 민생안정과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와 같은 태종의 업적은 다음 세종 대에 이르러 한 차원 높은 정치를 가능케 했다. 세종은 왕권의 안정 위에 유교적인 덕치와 민본정치를 지향하여 재위 32년 동안에 많은 치적을 이루어냈다. 학술과 언론을 중시하는 합리적 관료주의 사회를 정착시켰으며 국학 연구를 통한 민족문화의 정리 및 전분6등과 연분9등의 세법 정비, 그리고 대외관계의 개선 및 4군6진의 개척 등을 통해 사회 안정 및 국력의 신장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세종의 업적은 자신이 길러낸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에 크게 힘입었다. 특히 한글의 창제는 민족문화의 중흥에 일대 전기를 이루었으며 측우기 등 과학 기기의 발명은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드높인 것이었다.
이방원은 자 유덕(遺德). 휘 방원(芳遠).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양녕대군 (讓寧君大)이고, 제3자가 세종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元天錫)을 사사하였다.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요청의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을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도모할 때 1392년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하게 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었으며, 더군다나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정벌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단계에 이르자, 13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살해<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