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사] 고종시대에 대한 재 해석
- 최초 등록일
- 2004.10.22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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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화 초기의 고종의 개혁
(1) 고종은 과연 서양의 정치제도나 정치사상에 무지 했는가?
(2) 고종은 전제왕권 강화에 골몰했는가?
(3) 그렇다면 개화 초기 고종은 무엇을 했는가?
2. 중국의 방해
3. 청일전쟁과 아관파천
4. 대한제국의 성립과 광무개혁
(1)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의 진의는 무엇인가?
(2) 개화와 자강을 위한 광무개혁의 내용
(3) 대한제국의 개혁에 대한 평가는?
본문내용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일취월장한 서양문물은 동양의 정치지도자를 놀라게 했고, 당대의 조선의 정치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시기에는 소위 세도정치기를 통해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이를 마감하고자 등장했던 대원군은 내적정비를 우선한 나머지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정책을 폄으로써 서양세력과 담을 쌓았다. 친정에 나선 고종은 1880대 이후 서양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수용하고자 노력했는데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한성순보이다. 한성순보는 기존의 학설에 따르면 온건개화파 혹은 민씨척족정권의 개화정책의 산물이라고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본 식민주의 사관에 의해서 당대를 대원군과 민왕후 사이의 대립으로 정리한 결과이다. 이는 고종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실제로는 한성순보는 정부기관지로서 고종과 정부의 공식적인 개화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신문에서는 부강론에서 관부증진론의 관점에서 국가주도의 개화정책을 추구하였다. 구체적으로 자원개발과 통상의 촉진을 부국책의 요체로 언급하고 있는바 이는 당시 대원군이 왕후의 지원 아래에 열강들과 적극적인 수교를 자주 개화의 길로 인식하여 외교정책을 수립하려 노력했던 것과 일치한다. 다음으로 정체제도에 관해서도 신문에서 당시 개화파들에 의해서 소개되고 있던 다양한 정치제도가 모두 소개되고 특히 개화당의 주장이었던 입헌정체나 정당정치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즉, 여러 정당의 분립은 개화와 부강의 추진을 어렵게 할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 자료
고종시대의 재해석 - 이태진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