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 대전의 원인, 과정, 결과
- 최초 등록일
- 2004.06.20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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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차 대전의 원인과 과정
제1차세계대전의 특징
개전 날짜
유럽전쟁에서 세계대전으로
대전전사(大戰前史)
독일통일의 유산
개전의 위기
비스마르크체제의 성립과 붕괴
발칸문제
보스니아의 위기
영국·독일의 대립
대전의 발발과 경위
사라예보사건과 7월위기
슐리펜계획과 마른전투
주요 공방전과 과학무기
비밀외교의 전개
주요 교전국의 국내형편
독일의 정세
오스트리아의 정세
영국의 정세
프랑스의 정세
미국의 참전
잠수함전을 둘러싼 미국과 독일
미국의 참전과 14개조
러시아혁명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
전쟁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본문내용
청년터키당의 혁명은 오스트리아에 의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양주 합병의 계기가 되었고 양주 합병을 노리고 있었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조치에 대해 심한 불만을 나타내며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범슬라브주의의 맹주였던 러시아는 러·일전쟁과 제 1 차혁명(1905)의 상처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여서 오스트리아의 배후에 있는 독일과의 전쟁위험을 무릅쓰면서 세르비아를 지원할 수는 없었으며, 1909년 3월 오스트리아의 합병정책을 지지하던 독일총리 B. 뷜로브의 위협적 성명에 사실상 굴복하였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어쩔 수 없이 세르비아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의 조치를 승인하게 하였다. 러·일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러시아가 자중함으로써 보스니아 위기는 가까스로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고 수습되었다. 그러나 2차례에 걸친 발칸전쟁(1912, 1913) 후 사라예보에서의 오스트리아 황위계승자 페르디난트 암살사건을 계기로 같은 사태가 재차 발생하자 대전은 불가피하게 되어 발칸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오스트리아의 동진정책이 교차한 1875년의 전쟁절박 위기 때 예견되었던 것과 같은 형태의 전쟁이 발생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의 동진정책은 흔히 <범게르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정책을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같은 뜻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