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설]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 최초 등록일
- 2004.05.13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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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주석있음
목차
훈민정음 창제의 의도와 의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용비어천가 창작 동기
* 작품의 의의
* 작품의 형식과 주제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작품설명
불교서사시 월인석보
결론
본문내용
훈민정음으로 국문문학의 작품을 창작한 것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창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을 보아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라고 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에 필요한 노래였기에 그래야만 했고, <월인천강지곡>의 경우에도 그 비슷한 사정이 있었으리라고 한다면 피상적인 이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락을 붙여 부르고, 부르는 행위 자체를 즐기기도 하는 노래는 한문으로 옮기면, 그런 기능이 마멸하므로 차자표기를 해서라도 원래의 말을 기록하려고 애쓴 오랜 내력이 있다. 신라 때, 향찰로 향가를 표기하다가 한자와 우리말 음운·음절이 맞지 않아 불편을 겪었고, 향찰이 쓰이지 않게 되자 더욱 힘들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 누적된 오랜 소망이 있어 우리말 노래를 아무런 불편 없이 표기하는 국문을 창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사대부가 한문을 버리지 않고, 한문학을 자기네 문학으로 지키면서 시가문학에서는 한시와 함께 국문시가를 즐겨 지으며 시조와 가사를 발전시킨 것은 시가는 노래부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황(二黃)이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으면서 남긴 발문에서 그런 사정을 잘 설명했다. 그런데 사대부 부녀자들은 한문을 익히기 어려워 국문을 일상생활에 널리 썼다. 그래서 국문소설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조건을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시민을 위시한 하층 민중이 문자생활을 국문으로 하고 현실 인식과 흥미를 아울러 갖춘 문학을 요구하게 되자, 국문문학이 한문학과 맞서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끝내자 국문만 사용하고, 문학은 국문문학이라고 하는 데 이르렀다. 이처럼 국문 사용의 확대와 국문문학의 성장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의도나 계산과 관계없이 문자생활을 둘러싼 상·하층의 경쟁, 중세와 근대의 대결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국문은 시대마다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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