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교류사] 근세 동아시아 삼국의 교류 (15~17C)
- 최초 등록일
- 2004.01.05
- 최종 저작일
-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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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 글은 <제2부 조선사대부 사회의 이념과 동아시아>의 제3장 근세 동아시아 삼국의 전통사회에 대한 비교사적 고찰-표해록을 중심으로.. 를 요약한 글입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한중일의 문명교류에 대해 알수 있는 글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음 좋겠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절동연해
1) 한중일, 삼국교류의 추이
2) 최부가 본 비왜실상과 강남사회의 번영
3. 표해록(漂海錄)의 중국비판과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1) 표해록의 중국비판
2) 당토행정기의 조선비판
4. 한중일, 삼국의 사회적 이질성 심화
1) 중국의 신사층(紳士層)과 조선의 양반사회
2) 일본지식인의 폐쇄성과 조선사인(朝鮮士人)
5. 맺음말
본문내용
최부 일행이 표류하여 다다른 절동연해지역과 남방항로는 중·한·일, 삼국의 해상교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한반도 남단 흑산도에서 중국의 양자강구, 주산열도로 들어가는 남방항로의 중심하구는 양주, 항주, 영파항이며, 이는 천주와 광주까지 이어진다. 이 항로는 일본과 중국의 교통에도 마찬가지로 이용되어 오도에서 주산열도의 보타산이나 태주 혹은 정해지역으로 이어진다.남방항로 한중교류에서 중심 항로로 이용된 것은 10C경으로, 북방 정복왕조의 출현으로 서해안에서 산동반도에 이르는 북방항로가 위협받게 되면서부터이다. 또한 당말 이후 강남의 경제·문화 발달로 복건과 절강의 상인이 동아시아 각지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이 무렵 아라비아 상인들이 중국에 진출하여 강절의 양주와 명주는 광주, 복주, 천주와 더불어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중·한·일, 삼국이 교류하는데 남방항로가 선사시대부터 이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최부 일행이 처음으로 표류하였던 영파사 소속 하산은 관음성지인 보타산 부근이었다. 보타산은 한반도나 일본으로 가는 선박이 바람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곳으로, 삼국교류에서 중요한 항구로 부상하게 되었다. 일행이 마지막으로 등륙한 태주는 천태산의 소재지였으며, 강남지방에서의 선불교 번성으로 한, 일의 승려들이 참배행렬을 하던 곳이다.
참고 자료
조선 사대부 사회의 이변과 동아시아 - 3장 근세 동아시아 삼국의 전통사회에 관한 비교사적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