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 최초 등록일
- 2018.05.18
- 최종 저작일
- 2018.05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없음
본문내용
고구려의 부흥운동은 크게 한성 중심의 부흥운동과 압록강 이북지역의 부흥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한성을 중심으로 기병한 부흥군중 가장 먼저 부흥 운동을 개시한 세력은 검모잠이 지휘한 항전부대였다. 이들은 668년 10월 점령군의 주력이 철수한 다음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세력을 확대하면서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다. 검모잠은 시야도에 가있던 안승을 찾아가서 그를 설득하여 한성으로 데리고 왔으며, 그를 왕으로 하는 고구려국을 재건하였다.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는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당나라와 싸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승의 고구려국 재건을 인정하고 연합하여 대당 투쟁의 노선을 걷게 된다. 670년 여름까지 안승의 고구려국은 한반도 서북 일대의 통치 질서를 회복하고 7월에는 신라의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나라는 670년 4월에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671년에 요동으로 나와 안시성의 고구려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 고간이 다시 침입하였고 설인귀가 침공하였지만 모두 고구려-신라 연합군과 신라 수군에 의해 패하게 된다.
672년에 고간은 다시 4만명의 군사로 평양까지 침입하였지만 고구려-신라군이 이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추격전을 벌이다 당의 매복군에 의해 큰 손실을 봤다. 그 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당의 병력은 더욱 증강되어서 백수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한 다음 당군은 계속 남하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국은 서해안 일대 영역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안승은 계속 항전을 주장하던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땅으로 달아났다. 이 후에 당나라 군대는 계속해서 침입을 했고 신라는 안승을 보덕왕으로 삼아서 아직은 고구려왕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 고구려 군사들을 대당 저항에 이용하려 하였다.
압록강 이북 요동지방에서도 고구려인들의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다.
668년 9월 이후 입록강 유역 이북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에 의하여 많은 성들이 수복되기도 하였고 일부 성들은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추가적으로 강점되기도 하였으나 고구려인들의 부흥 운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