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
- 최초 등록일
- 2018.01.21
- 최종 저작일
- 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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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위 작품은 1805년 정약용이 맏아들 정학연이 자신이 머물고 있는 강진에 찾아오자 그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정조대왕의 신임 가운데 국정의 한 주체였던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승하와 더불어 불어 닥친 노론 반동 정치의 험한 물결에 휩쓸고 만다. 졸지에 정약용의 일가는 폐가망신의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정약용은 둘째형 정약전과 함께 남녘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두 형제는 나주 율정에서 울며 헤어졌다고 한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다.
강진에서의 귀양살이는 1801년 겨울철부터 시작되었다.
다산은 정조의 개혁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밀려오는 좌절과 고독에 좀처럼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심경은 「객중서회(客中書懷)」란 작품에 잘 드러나고 있다.
‘흩날리는 눈처럼 북풍이 날아와 / 남녘 땅 강진의 밥 파는 집까지 왔네 / 그나마 남은 산이 바다 빛을 가려주고 / 대숲 둘러 세월을 보내게 됨 다행일세 / 땅의 장기 때문에 겨울 옷 외려 얇고 / 근심 많아 밤중이면 술을 더 마신다네 / 나그네 근심을 녹여주는 한 가지는 / 섣달 전에 동백이 꽃을 피운 것이라네’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극단의 반동정치를 하게 되는 데 당연히 이들과 대척점에 섰던 정약용를 비롯한 남인계열은 대거 숙청을 당하게 된다.
숙청의 빌미는 천주교도라는 것이지만 이는 표층적인 명분일 뿐 이들의 최종 목적은 이가환, 정약용, 이벽 등 남인의 씨를 말리려는 노론벽파의 정치적 공세였던 것이다. 증오의 시대, 어둠의 시대에 정약용은 ‘묻지마’ 증오에 그대로 관통당하고 만다.
당시 정약용 일족(一族)이 당한 참혹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다산의 큰 형님의 사위인 황사영은 백서사건으로 참형, 다산의 막내 형 정약종은 국문 후 참수, 이벽의 부인이었던 다산의 여동생은 제주도 노비로 끌려간다.
둘째 형인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은 겨우 죽음에는 벗어났으나 변방의 끝인 남도 강진과 절해의 고도 흑산도로 유배를 당하고 만다.
말 그대로 일문이 폐족(廢族)을 당한 것이다. 다산 집안의 폐문은 곧 정조의 개혁이 무너짐과 맥락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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