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곡의 양명학 (하곡학, 양명학, 하곡, 정제두)
- 최초 등록일
- 2017.04.08
- 최종 저작일
- 20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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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霞谷(하곡)鄭齊斗(정제두)의 生涯(생애)
2. 霞谷(하곡) 당시의 朝鮮(조선)의 정치현실
3. 霞谷에게 영향을 준 인물
1) 南溪(남계) 朴世采(박세채)
2) 明齋(명재)尹拯(윤증)
4. 交友(교우)관계에 나타난 霞谷(하곡)의 양명학적 입장
1) 誠齋(성재) 閔以升(민이승)
2) 明谷(명곡) 崔錫鼎(최석정)
3) 鄭景由(정경유)
4) 기타 인물들
5. 霞谷(하곡)의 思想(사상)
1) 理氣論(이기론)
2) 心性論(심성론)
6. 결론
본문내용
1. 霞谷(하곡)鄭齊斗(정제두)의 生涯(생애)
鄭齊斗(정제두)의 자는 사앙(士仰).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하곡(霞谷), 정 몽주의 11세손으로 진사(進士) 정상징(鄭常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한성부 반곡방(盤谷坊)에서 출생하였으나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 마을에서 살았다. 어려서는 이상익(李商翼)에게 수학하다가 20여세 때부터 박세채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 하였다. 선생의 집안은 당대의 손꼽히는 명문이었지만 청년기의 가정생활은 다복하지 못했 다. 5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16세 때에는 할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23세 때에는 부인(파 평 윤씨)마저 그 해에 낳은 아들(원일 : 原一)을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26세 때 남영 서씨와 재혼하기에 이르렀다. 젊은 시절의 선생은 건강도 좋지 않았다. 선생의 건강상태는 관직에 나갈 수 없음은 물론 30대의 젊은 나이임에도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일찍이 20세 때 별시 (別試)ㆍ초시(初試)에 응하여 합격한 뒤 24세 때 동생(정제태 : 鄭齊泰)와의 공동 응거(應 擧)의 불미스러움을 이유로 재차의 초시 합격에서 중단하고 두문불출하였다. 32세 때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천거하여 사포서별제(司圃署別堤)에 임명되었으나 질병으로 취임하지 않았다. 2년 뒤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지만 질병이 더 하여 취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병약으로 동생(정제태 : 鄭齊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스승인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에게 마지막 유서를 해당하는 편지를 써 보낼 정도였다. 40세가 되자 병세는 점차 호전되는 듯하였다. 이 때 평택현감에 제수되어 어머니의 권유 등으로 이듬해 취임하였으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향 문제의 불만으로 두 달만 에 그만두었다. 평택으로부터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로 돌아온 선생은 이 때 가래울에 서실 (書室)을 짓고 다시 독서와 학문의 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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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