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의 생애와 정치
- 최초 등록일
- 2016.12.16
- 최종 저작일
-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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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몽양 여운형의 생애
2. 건국준비위원회
3. 몽양 여운형의 사상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몽양 여운형의 생애
몽양 여운형(1886-1947)은 1886년 5월 19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여정현과 경주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에 용인에 사는 유세영의 장녀와 결혼했으나 4년 만에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와 재혼했다.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나 1년도 못되어 그만두고 민영환이 설립한 홍화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03년 직업을 갖기 위해 통신원 부설의 우무학당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그 학교마저 그만두었다. 1907년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 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봉제사의 집안 전통을 혁신하고 노복들을 풀어주는 등 안팎으로 변혁을 일으켰으며 다음해인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한 뒤 강원도 강릉에서 남궁억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초당의숙의 교사가 되어 청년교육에 힘썼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징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17년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다음해에 청년동포들을 규합하여 상해고려민친목회라는 민단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또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하였고, 3월 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쓰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2월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치문제를 타진해오자 찬부양론이 있는 가운데 동경으로 건너가 당시 척식국장인 고가를 비롯하여 노다 체신 대신, 무단정치가의 중심인물인 다나카 그리고 이즈노 정무총감 등과 일련의 회담을 통해 일제의 자치제 제안을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
1920년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 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참고 자료
이정식 저, 《여운형》, 서울대학교출판사, 2008.
이기형 저,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2004.
김삼웅 저, 《몽양 여운형 평전》, 채륜, 2015.
박병엽 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최용범 지음,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