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에서의기독교세력과민족주의
- 최초 등록일
- 2016.05.17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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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기독교 민족주의
Ⅲ 기독교 민족주의의 성립 과정 (~1910년대까지)
1. 기독교 민족주의의 수용
2. 기독교 민족 운동의 논리
3. 일제 강점 후 기독교 민족운동의 추이
Ⅳ 기독교 민족운동의 논리와 국가관
Ⅴ 기독교 민족주의의 경제운동과 농촌 운동
1. 민족 자본주의 경제운동과 근대화론
2. 농촌운동과 농촌 재건의 논리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1919년 3․1 운동에는 많은 종교인이 참가했다.
민족대표 33인에는 천도교, 불교, 기독교 지도자가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에 종교인이 많이 참가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결성식이 있었는데 이 단체는 조선인의 희생을 강제한 동원의 통제망이며 이 조직에는 조선인 종교단체가 대거 참여하게 된다.
소위 정동연맹에 참여한 단체들은 1938년 통계로 보면 교세가 적은 성공회조차도 7천여 명의 교도가 있었고 장로회의 신도는 27만 명에 달했다.
조선인 사회에서 종교인세력은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일제는 이들은 전쟁의 동원단체로 만들려 했으며 각 종단이 정동연맹에 가입한 것은 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유림은 발기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유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안인식이 개인으로 발기인이 되었고 일제의 뜻에 따라 동원단체화를 꾀하였으며 그 결과로 유도연합회를 결성하여 정동연맹에 가맹하게 된다.
일제는 중일 전쟁 이후 파쇼 동원 체제를 구축하면서 각 종단을 동원단체로 만들려 하였다.
기왕에 일제에 굴종한 종단은 중일 전쟁 후 별 저항 없이 동원 활동에 나섰다.
먼저 불교는 무운장구 기원제, 국방헌금, (일본군)위문 따위의 침략 전쟁 후원활동을 스스럼없이 진행했다.
“총독부 ➩ 불교중앙조직 ➩ 사찰”의 동원 통제선은 이미 구축되었었고 또한 일제는 마지막으로 “사찰 ➩ 일반 대중”의 동원 통제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천주교 역시 별 다른 저항 없이 일제의 동원정책에 따르는데 중일 전쟁 전에 이미 교회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비합리적 천황제 이념과 교리적으로 대치되지 않으니 침략전쟁도 별 무리 없이 수용된 것이다.
이처럼 다른 종단처럼 일제의 동원단체로 변질되기는 하였지만 일제에 항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천주교가 독립운동의 기반이 약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 고등관리가 참석하고 라디오로 중계하는 기원제를 개최할 정도로 쉽게 전쟁 선전에 이용된 것 역시 사실이다.
참고 자료
노치준, <근대 한국의 종교와 민족주의 문제 - 외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동덕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5
이중연, 황국신민의 시대, 혜안, 2003
장규식, 일제하 한국 기독교민족주의 연구, 혜안,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