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살인 '민청학련' 사건, 무죄판결
- 최초 등록일
- 2016.02.03
- 최종 저작일
-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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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 민청학련사건의 배경과 전개
2. 민청학련 배후설
3. 민청학련사건 재심
맺음말
본문내용
1. ‘민청학련’사건의 배경
미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의 완화에 따라 7·4남북공동 성명을 발표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 가까워진 당시를 박정희 정권 유지의 위기 상황이라 인식했다.
자신의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10월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는 이러한 유신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라 하여 합리화시켰다.
1973년 8월,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이던 김대중(金大中)이 납치된 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받아 반유신체제운동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반독재·반체제 움직임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일부 야당인사·지식인·종교인들은 민주헌정의 회복 및 공화당 정부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본격적인 개헌서명운동을 벌였다.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김정길에게 서울의 나병식, 한성기 등으로부터 전국적인 투쟁을 준비하자는 제안이 들어온다.
당시 김정길은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상태라 정보기관의 감시가 심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광주일고 3년 선배인 윤한봉(전남대 농대 축산과)를 소개해준다. 이것이 광주전남지역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조직결성의 출발이 된다.
참고 자료
김희송,2009,〈시민운동의 형성과 제도화에 관한 연구-광주지역 시민운동을 중심으로〉,《전남대학교 대학원》,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52쪽
문형래,2009,〈법에 내재된 정치와 폭력에 관한 연구 : 유신체제 형성과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중심으로〉,《성공회대학교 NGO 대학원》,성공회대학교 도서관,94~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