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진평왕대의 정치동향과 김춘추 김유신세력의 부상(浮上)
(1) 진평왕대 정치동향
(2) 김춘추 김유신 세력의 부상(浮上)
3. 진평왕 사후의 정치동향
4. 비담의 난
5.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신라의 상대 말기는 매우 복잡한 사건들의 나열이었다. 진흥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를 왕을 정하는데 진지왕파와 진평왕파 지지세력으로 나뉘었고, 진지왕이 밀려나면서 그의 자손인 용춘과 춘추가 가야계 김유신과 손을 잡고 다시 권력을 얻는 과정이 나타났다. 또한 이러한 신흥세력에 반대하여 상대등 비담이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본 발제에서는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기 까지의 정치동향과 그 속에서 떠오르는 신흥세력인 김유신 김춘추의 활약, 그리고 이러한 세력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건인 비담의 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것이다.
2. 진평왕대의 정치동향과 김춘추 김유신세력의 부상(浮上)
(1) 진평왕대 정치동향
신라 제 26대 진평왕은 기해(己亥)(579)에 왕위에 올랐는데, 진흥왕(眞興王)과 사도(思道)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동륜태자(東輪太子)의 아들로, 동륜과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 만호(萬呼)부인사이의 소생이다. 진흥왕 33(572)년에 동륜이 죽자, 정계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귀족세력이 진지왕(眞智王)계와 진평왕계로 양분되었다. 이렇게 정계가 양분된 이유는 각자의 정치권력상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는데, 그들의 지지 명분은 서로 달랐다. 이 두 왕의 출자(出自)로 보아 진지왕 지지파는 왕의 현실적 지배능력을 강조한 반면, 진평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왕통(王統)의 원칙적 장자상속을 내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또 두 세력은 진지왕 원년에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한 거칠부(居柒夫)를 중심으로 한 내물왕계(奈勿王系)의 진지왕 추대(推戴)세력과, 이에 반하여 진평왕 원년(579)에 상대등이 된 노리부(弩里夫)를 중심으로 한 진평왕 추대세력으로 나뉘었다. 두 세력의 대립 후 진평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때 진지왕을 지지했던 거칠부를 중심으로 한 내물왕계가 몰락했다.
비록 진평왕이 국인(國人)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진지왕의 아들 용춘(龍春)과 그 아들 춘추(春秋)가 진평·선덕(善德)·진덕(眞德)왕대에 걸쳐 계속 중용된 것을 보아, 진지왕의 자손은 홀대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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