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노부스케와 박정희 독후감
- 최초 등록일
- 2015.07.08
- 최종 저작일
- 2014.10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 10,000원
- 100 page
- PDF 파일
- 상세 보기
목차
없음
본문내용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 주도 후 도쿄 내 수상관저에서 벌여진 만찬회에서 기시 노부스케와 처음 대면하여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림” 발언을 통해서 그의 자존심을 자극해 마음을 흔드는 기특한 격정을 토로한다. 이에 기시는 박정희의 문제가 자신의 경험과 맞물려서 만주국의 잔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만주국의 경험을 토대로 대한민국이 농촌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정희의 사망 후 기시의 혜안처럼, 만주국의 고질병이었던 농업 문제를 대한민국은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극복하였고 그는 이러한 경제 정책 성공을 박정희의 가장 큰 공덕으로서 평가한다. 이처럼 기시가 한국에 기울인 관심은 반공주의적 동맹관계의 구축이라는 눈앞의 현실정치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그는 만주국에서의 미완의 혁명을 대한민국에서 박정희가 실현해 나가리라는 기대를 품었음에 틀림없다.
만주인맥은 ‘반공’이라는 대의와 만주국에 대한 향수, 그리고 막후의 채널을 포함한 리베이트와 커미션이 융합된 가히 “부패와 유착의 인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만주인맥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사람,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는 ‘요괴’와 ‘독재자’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시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얽히는 두 사람의 성장과정은 가히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극명히 달랐다고 한다. 명망 높은 혈연 공동체를 발판 삼아서 유복한 제국 대학생이자 소장관료로서 제국 엘리트로 활약한 기시와 달리, 박정희는 식민지의 어느 산촌에서 태어나서 불운한 유·청소년기를 보냈다. 그 후 사범학교를 나와 초급교사로서 활동할 때까지는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않았지만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로 진학하고 다카키 마사오로 개명까지 하고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만주국 황제인 ‘푸이’에게서 금시계까지 하사받게 되었고, 그 후에는 만주국 육군 중위로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발자취는 ‘내선일체’와 ‘선만일여’ 사이에서 제국적인 주체로 변신한 전형적인 식민지 청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