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역사_조선통신사역사관
- 최초 등록일
- 2015.02.11
- 최종 저작일
- 2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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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통신사란?
조선후기 임진왜란 이후 선조때부터 시작한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幕府)의 쇼군(장군)에게 파견되었던 공식적인 외교사절단을 일컫는 말이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로 이들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까지 각 번(고을)과 주의 안내를 받아 6개월에서 1여년의 시간을 이동했다,
통신사의 활동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 이하,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이었다.
17세기 중엽이후 쇄국정책으로 고립되었던 왜는 유일하게 정식외교를 맺은 조선과의 우호가 정치적 안정이라는 명분과 문화수용이라는 면에서 대내외적으로 중요했다.
통신사는 왕의 국서를 막부에게 전한다는 외교적인 역할 외에도 글,음악,그림,등 예술과 의술,교역에 이르기까지 양국간의 문물교류의 중심이였다.
: 통신사 행렬 중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학산록" 이라는 일본의 기록에는 "조선국의 마상재는 실로 절묘하고 기묘한 기예이다." 라고 적고 있다. 마상재란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인데 인조때 일본의 사정로 마상재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어 시작되었고 그 이후 통신사가 일본에 갈때마다 마상재인 2명을 보내 마상재의 기술을 일본에 선보였다.
2. 조선통신사역사관
일본으로 향하는 “첫 관문”이였던 부산은 조선통신사에 있어서 중요한 요충지 이였다. 부산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일본으로 가져갈 짐과 수행원, 배 등을 점검하고 좋은 날을 택해 출발 날짜를 잡았다. 이 때 부산에는 안내를 맡은 쓰시마 번의 배가 마중 나와 있었고, 통신사단은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에 길일을 잡아 영가대에서 무사 항해를 비는 ‘기풍제’를 올리고 일본으로 출항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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