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애와 사상
1.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애
2. 야나기 무네요시 사상의 배경과 변모과정
Ⅲ.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예술
1. 조선예술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만남
2.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애미론
3.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사상
Ⅳ. 주변인물
1. 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浅川伯教, 浅川巧) 형제
2. 버나드 리치(Bernard H. Leachi)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의 문화유산을 사랑한 일본인이다.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글을 통해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역설하였으며 조선의 예술품을 각별히 사랑하여 조선미론을 세웠으며 민족문화의 전통이 보존되는 한 조선의 민족정신은 말살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종교철학가이자 미술평론가로 민예운동을 창시하였고 한국인에게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양심, 조선을 사랑한 휴머니스트라는 평가를 받았고 사후인 198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은 만큼 그의 조선예술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였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론에 중점을 두고 그의 생애, 사상과 주변인물을 다루고자 한다.
Ⅱ.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애와 사상
1.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애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애는 군국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에 걸쳐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때는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강제개국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에 착수한 지 20여 년이 흘러 근대 국가체제가 정비되던 시기였다. 그의 성장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달으며 주변국을 식민지화하는 때에 해당한다. 그가 주로 활동한 때는 일본이 만주사변, 중일전쟁, 진주만 기습 등으로 이어지는 전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패전하여 전쟁폐허 복구를 위해 열을 올리던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889년 3월 21일 동경 아자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각슈인(學習院)에서 지냈다. 각슈인은 당시 일본 귀족자제의 교육기관이었는데 야나기는 20세기 초 군국주의 교육의 온상이었던 각슈인의 환경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이에 어떤 이념이나 주의에 좌우되지 않는 보편적인 가치를 찾고자 결심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다윈의 진화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접하고 과학이 인생의 문제를 실증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11년 동경제국대학 철학과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1911년에는 그의 최초의 단행본인 <과학과 인생>을 출판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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