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케네디·존슨과 박정희 한미동맹
- 최초 등록일
- 2014.11.25
- 최종 저작일
-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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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변이 성공할 수 있었던 대내외적인 원인과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한국과 미국의 긴밀한 관계 형성 그리고 이후 1.12사태를 포함한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계기로 틀어진 한미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개요가 담겨져있다.
특히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의 경제적 이익이과 발전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주목할만 한다
목차
1. 머리말
2. 5·16 군사정변과 동맹의 확인
3. 베트남 파병과 동맹의 강화
4. 북한의 도전과 동맹의 긴장
5. 맺 음 말
본문내용
1. 머리말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된 이후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미국과 소련의 대립되는 이념체제가 종결될 때 까지 미국 국가안보정책의 핵심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봉쇄’(containment)하는 것이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의 이념 대립은 절정에 이르렀고, 1960년대는 냉전의 ‘세계화’와 ‘국제화’가 더욱 가속화된 시기였다. 1960년대 당시 미국의 냉전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의미와 상징을 갖고 있는 국가는 바로 남베트남(Republic of Vietnam)이었다. 베트남은 첨예한 이념대결의 ‘시험장’으로써 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의 정도와 규모는 급속도로 증가되어 갔고 이에 베트남 전쟁이란 ‘미국화’(Americanization)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미국은 존 케네디(John F. Kennedy) 상원의원의 대통령 당선을 시작으로 대규모 미군을 투입하여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전쟁으로 만든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을 거쳐, 이후 반전(反戰)운동이 들끓자 베트남전쟁의 종식을 주도한 리차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마감되었다.
<중 략>
모른다는 정일권 국무총리의 말에 밴스는 그럴 경우 미국은 한반도에 주한미군을 철수 할 것이라고 응수한다. 결국 박정희는 미국이 자신의 ‘보복’주장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존슨행정부는 한국의 안보와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약속을 재차 강조했으나 결국 한·미간의 상호신뢰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고 한·미동맹의 긴장이 계속되어갔다. 이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는 영원히 그리고 전적으로 미국에게 의존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여 자주(自主)국방체제의 조속한 확립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한다. 한·미동맹 관계의 실체를 1968년 ‘한반도 사태’를 통해 알게 된 그는 250만 명에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였고 획기적인 군수산업을 육성하는데 주력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반도를 한국의 군사력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