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궁예의 출생과 성장과 관련된 인식
Ⅲ. 건국 후 도읍 관련된 인식
Ⅳ. 최후와 관련된 인식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역사의 기록에 대한 이해 방법은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관점으로는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과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 이 2가지이다. 이 중에서 또 승리자에 대한 기록은 긍정적인 부분이 위주인 관점이고, 반면에 패배자에 대한 기록은 부정적인 부분이 위주인 관점이다.
즉, 과거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역사’에서는 단절이 발생한다. 물론 과거를 이해하려고 하는 현재인들의 역사해석상의 단절이다. 역사해석상의 단절은 여러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역사가가 선택한 사실만의 강조에 따라 전후의 사실과 연결의 고리가 끊기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선악의 도덕적 판단’의 경우에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으로 규정된 실체를 강조하기 위해 나머지의 실체를 부정해야하는 경우다. 이런 대표적인 예가 궁예와 왕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설화는 기억하고 싶었던 사람들에 의해 진실적 요소와 가공된 이미지가 동시에 복합해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설화 속에는 실제의 인물이나 사건을 미화하거나 폄하여 전해진 내용도 적지 않다. 역사는 그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데 설화에서는 부정적인 이식이 별로 찾아지지 않는다. 역사와 설화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렇기에 궁예에 대한 왜곡된 해석은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난 왜곡된 해석을 재조명하는 쪽이라기보다는 역사와 설화의 관점으로 궁예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 그의 새로운 모습을 추적해보려 한다.
궁예에 대한 연구는 대표적으로 먼저, 1145년 (고려 인종 23년) 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하에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구성은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연표(年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중 열전 10에 기록되어 있는 궁예와 견훤이 대표적인데 김부식은 그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참고 자료
『三國史記』 50 弓裔列傳
『高麗史』1 太祖世家
이영수, 2006, 「궁예 설화’의 전승 양상에 관한 연구」, 『한국민속학』 43, 한국민속학회
이재범, 2005, 「궁예·왕건정권의 역사적 연속성에 관한 고찰」, 『사림(성대사림)』, 수선 사학회
김기창・박미영, 2004, 「한국구전설화집 9(충남 청양편)」, 『민속원』,p. 125~126
계연수, 2002『환단고기』, 임승국역, 정신세계사, p.312
정청주, 1986, 「궁예와 호족세력」,『전북사학』 10
정선용, 1997,「궁예의 세력형성과정과 도읍형성」, 『한국사연구』
이수자, 2002, 「안성의 설화, 구비문학연구」, 『구비문학연구』, 제14집
최웅, 김용구 편 1998,『설화』, 국학자료원, p487~489
이재, 1995, 「경기도 연천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육군박물관 유적조사 보고』,2집, P 128
철원문화원, 1998,『쳘원 향토지 3』
이재, 2001,「포천 운악 산성 지표조사 보고서」,『육군박물관 유적조사 보고』P. 53
최남선, 1973, 「풍악기유」, 『최남선전집』6,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편
처상찬, 1923, 「태봉왕 김궁예는 어떠한 인물인가」, 『개벽』42, P.103
이재범, 2000,『슬픈궁예』, 푸른역사
김시연, 2008, 『궁예의 나라 태봉:그 역사와 문화』,일조각
조인성, 2007,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