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감독분석
- 최초 등록일
- 2014.08.28
- 최종 저작일
- 2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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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국 영화의 반역정신, 김기영 (1919 ~ 1998)
2. 컬트 영화 감독으로서의 재발견
3. 장르의 혼합을 통한 ‘김기영 장르’ 형성
4. 조명과 색채 실험
5. 김기영 감독의 ‘여성 영화들’
6.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평양 고보 졸업 후, 일본 경도로 유학을 떠난다. 일본 경도의 학생 극장을 자주 이용하던 김기영은 독일 영화 <망향>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모스크바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을 공부하고 돌아와 극작 강의를 들으며 예술 세계를 넓혀 간다.
해방 후, 경성치과의전(현 서울대 치의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학과 공부보다는 통합 연극반을 창립하여 연극 연출에 힘을 쏟았다.
6. 25 전쟁이 발발하고 김기영은 생계를 위해 영화 만드는 일에 종사한다. <시집가는 날>의 극작가인 오영진의 권유로 <대한 뉴스>를 만드는 일을 돕는다. 하지만 당시 오영진 작가는 폐병을 앓고 있어 대본부터 촬영, 편집까지 모든 일을 김기영이 도맡아 작업을 했고, 그동안 쌓은 극작 훈련을 발휘하여 뉴스에 극적 상황을 집어넣는다. 이런 김기영의 실력을 알아본 미 공보원 측은 거액의 스카웃 제의를 건네고 당시 김기영은 처와의 결혼 자금을 벌기 위해 USIS로 이적하고 본격적으로 뉴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최첨단의 영화 기자제를 접하게 되면서 영화적 경험의 바탕을 쌓는다.
<중 략>
1970년대, 영화에 대한 관심은 리얼리즘으로 아주 빨리 넘어오기 시작했다. 1975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 나오면서 50~60 년대의 계몽 영화들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한국 영화의 흐름은 충무로의 젊은 피로 뒤바꼈다. 70년대 후반, 충무로는 영감쟁이들은 모두 사라져야한다는 담론을 펼치며 기성새대에 대한 굉장한 적대감이 팽배했다. 그렇게 기성감독들은 파산 위기에 처했지만, 정작 젊은 신인 감독들은 대마초 사건으로 대거 구속되는 사건을 가져왔다. 80년대는 많은 데모와 정치적 문제로 영화를 보러갈 여유가 국민들에게는 없었다. 이 때가 바로 한국 영화의 공백기였다고 볼 수 있다. 비판적 리얼리즘이 도덕적 가치를 받는 그 당시, 많은 영화인들이 모더니즘 영화에 눈을 돌릴 기회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디오의 출현이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자유로움이었다.
참고 자료
필름 2.0
전설의 낙인
24년간의 대화
한국영화감독론
김기영인터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