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세미나,열하일기, 개혁과 삶의 노정,박지원은 『열하일기』
- 최초 등록일
- 2014.07.24
- 최종 저작일
- 2014.07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Ⅰ. 저자소개
Ⅱ.내용요약
Ⅲ. 발췌 논평
1. 강물과 언덕 그 사이의 도
2. 기술과 제도가 구비되고 의식주가 넉넉하다면 덕이 바로잡힌다!
3. 중국의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과 냄새 나는 똥거름에 있다.
4. 내 스스로 다다를 수 있는 도의 경지
Ⅳ. 서술논평
1. 열하일기를 통해 본 지도자의 덕목
본문내용
Ⅰ. 저자소개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최고의 명성을 얻은 문장가이자 북학파의 중심인물 이었다. 노론 벽파 출신이었던 그는 변변한 벼슬하나 없었으나 18세기 후반 지성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유년시절 연암은 과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로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연암은 1768년 백탑 근처로 이사를 하여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이용후생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시파인 홍국영이 세도를 잡아 벽파였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결국 황해도 금천 연암협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1779년에 홍국영이 실각하게 되면서 연암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다. 연암의 삼종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 축하사절로 중국에 가면서 연암을 비공식 수행원인 자제군관으로 동행시킨다.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동행하였기 때문에 책임이나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것이 『열하일기』이다.
연암은 이 책에서 당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때는 명에 대한 의리와 결부해 청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현실적 수용력이 부족하였다. 특히 보수적 성향의 유림과 문단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열하일기』를 발표하면서 주가를 올리던 연암은 이어 친구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안의현감에 재직하던 때 연암의 『열하일기』는 정조의 문체반정의 대상이 된다. 연암이 사용한 패관문체가 서민적 문예에서 나타난 자유분방하고 감각적인 문체로서 양반가에서 주로 쓰이던 장문 고문체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연암은 속죄하는 뜻에서 순정한 글을 지어 정조에게 바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