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 신묘년조의 문제
- 최초 등록일
- 2014.06.14
- 최종 저작일
- 2014.05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광개토왕릉비란?
2. 신묘년조의 문제
2.1. 신묘년조의 비문
2.2. 비문해석의 방향
2.3. 비문해석의 문제점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비는 각력응회암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원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과 광개토왕이 기록되어있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있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과 1,400개의 촌을 공파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과 토경순수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참고 자료
서영수, 「설림 : 광개토태왕비의 재조명」, 『사학지』38권, 단국사학회, 2006, 257-287 쪽.
이도학, 「『광개토왕릉비문』의 역사적 성격과 특징」, 『박물관학보』23호, 박물관학회, 2012, 95-118 쪽.
이용현, 「일반 논문 :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고구려의 동아시아 인식 - 신묘년조의 재인식 -」, 『고구려연구』 22권, 고구려발해학회, 2006, 179-194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