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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4.04.23
- 최종 저작일
- 20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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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경복궁의 개요와 찾아본 이유
2. 대상 공간문화자원의 가치와 소개- 경복궁의 구조와 가치
3. 대상 공간문화자원의 관리의 문제점과 대안
4. 궁궐과 궁에 대하여
5. 궁과 궁궐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본문내용
경복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1-1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적 제117호이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렸다
태조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다음 즉위 3년(1394)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경복궁을 짓기 시작하여, 그 다음해에 경복궁을 완성하였다. 이때의 경복궁 규모는 390여 칸으로 왕궁으로서는 소박한 편이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에 나오는"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경복(景福)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겨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다시 옮겨 정궁으로 이용하였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를 지었는데, 연못을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이때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는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을 세웠다. 또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 관측 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1553년(명종 8) 강녕전에서 불이나 강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강녕전과 교태전·연생전·흠경각·사정전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창경궁 등과 함께 모두 불타고 말았다. 이후 경복궁을 복구하려고 여러 차례 논의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
이진영, 이화영외 4명. 임금님도 모르는 경복궁 이야기. 인물과 사상사. 2006
경복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양택규. 책과함께.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