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개발되어온 역사를 조사하고 개발이 가져온 이득
- 최초 등록일
- 2014.03.21
- 최종 저작일
- 2014.03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Ⅰ. 서론
1. 개요
2. 고대시대
3. 신라시대
4. 고려시대
5. 조선시대
6. 근대
7. 현대
Ⅱ. 본론
1. 양산신도시 개발
2. 고리 원자력 발전
3. 사회적 문제
Ⅲ. 결론
1.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안적 방향
본문내용
[서론]
- 개요내가 살고있는 경상남도 양산시는 산과 들이 좋고 문화 유적이 많으며, 고대로부터 불교 포교지로서 그 명성이 높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 곳이다.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쪽은 낙동강을 끼고 밀양시와 김해시, 동쪽과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금정구에 각각 접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개발이 가져온 사회문제에 대하여 논하기 앞서 내가 살고있는 지역의 고대시대때 부터 역사를 서술하고 차례대로 논하기로 하겠다.
- 고대시대경상남도 양산시는 하북정 고분군에서 출토된 타제석기 유물로 보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 및 청동기 유적으로는 양산시 다방동에 있는 패총이나 양산 신기리 지석묘·북정리 고인돌군·하북정 고분군 유구 하층의 부패토층에서 출토된 무문토기·평산리 주거 유적 등이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삼한(三韓)의 변진(弁辰) 지역이다. 독로국(瀆盧國)이 있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1~4세기경 양산은 김해를 중심으로 형성된 가야 지역 연맹체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신라시대초기에는 마두(馬頭)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77년(탈해왕 21)과 115년(지마왕 4)에 신라와 가야가 황산나루에서 전투하였다. 417년(눌지왕 1)에 박제상(朴堤上)이 삽량주간(歃良州干)을 맡고 있었다는 기록과 463년(자비왕 6)에 왜가 삽량성을 침략하였다가 대패를 당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신라 초기에 양산의 옛 이름이 삽량임을 알 수 있다. 665년(문무왕 5)에 그 영역을 확대하여 9주 중의 하나인 삽량주에 치소를 둔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그 뒤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적으로 군현 명칭이 개편될 때 삽량주를 양주(良州)로 개칭하고 1소경, 12군, 34현, 4정으로 개편하였다. 삼국 통일 이래 양산 지역은 제철업의 중요한 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양산은 현 물금 지역 배후에 위치하는 황산[오봉산]을 채광지로 삼고, 여기에서 운반해 온 철광석을 파쇄하고 선광·제련·정련하여 1차 생산된 철괴는 낙동강이나 양산 단층 지대를 따라 개설된 도로를 이용하여 내륙 지방까지 공급되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양산시지』(양산시지편찬위원회, 2004)
양산사료총람』1(양산향토사연구회, 2005)
한국원자력문화재단 제출자료, 조승수 의원, 2011.3.24
지식경제부·한국원자력문화재단,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