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의 징비록
- 최초 등록일
- 2014.01.26
- 최종 저작일
- 2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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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유성룡의 생애
2. 임진왜란의 주요내용
3. 징비록에 대해서
본문내용
1. 유성룡의 생애
유성룡은 1542년(중종 37) 경상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즐겨 1557년 향시(鄕試)에 급제한 후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64년(명종 19) 생원회시(生員會試)에 합격한 뒤 1565년 태학에 입학하여 1566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나가 1582년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를 지어 올렸다.
1583년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병간호를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 효성에 감동한 선조는 그의 고향집에서 가까운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584년부터 1588년까지 예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자신의 죄를 스스로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590년에는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하였다.
<중 략>
일본군의 대함대를 맞아 원균은 수륙합동작전을 주장했으나 총사령관 권율은 이를 듣지 않고 바다로 나가 싸우라고 명령, 곤장을 쳐서 내보냈다. 하는 수 없이 출전한 원균은 싸우다 전사하고 함대는 대파되었다. 일본군은 경상, 전라 일대를 점령했다. 이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일본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하는 적의 뒤를 공격하다가 이순신 또한 노량에서 전사했다. 7년에 걸친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참고 자료
유성룡 지음, 남윤수 역해,《징비록》, 하서, 2004.
김철호 외3 엮음, 《세계의 사상100선》, 녹두, 1994.
송은영 엮음,《한국대표 역사 인물사전》, 홍진P&M, 2006.
박은봉 지음,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최용범 지음,《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