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와 동예
- 최초 등록일
- 2003.05.14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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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옥저와 동예에 관한 자료는 인터넷에 정말 드물더군요..
저도 잘 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인터넷에 있는 내용은
여기에 다 있을 겁니다.. 그만큼 많이 찾았고.. 또 책도 많이 찾아보고 쓴 거니까요..
목차
동예의 문화와 사회
옥저의 문화와 사회
동예와 옥저의 문화비교
본문내용
동예 (東濊)
고대 동해안 지역에 거주한 종족.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의복만 약간 달랐을 뿐, 풍속과 언어는 고구려와 같았다. 3세기에도 읍락(邑落)이 산과 하천을 경계로 구분되었으며, 함부로 다른 구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만약 다른 읍락민이 구역 내로 침범하면 곧바로 소·말을 물리는 책화(責禍)를 하거나 생구(生口:노예)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읍락 내부에 아직도 공동체 단위의 생활이 주로 영위됨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예지역에서는 강력한 대군장(大君長)이 출현하지 못하고, 단지 후(侯)·읍군(邑君)·삼노(三老)가 각 읍락을 다스렸다. 일찍부터 낙랑군은 옥저(沃沮)와 동예지역에 7개현을 설치하여 간접 통치하였는데, 이들 명칭은 그들이 각 읍락의 거수(渠帥)에게 하사한 것이다. 현후(縣侯)는 낙랑군 관리의 명칭을 빌어 휘하의 관리를 공조(功曹)·주부(注簿)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2세기 후반 이후 동예는 고구려 지배하에 있다가, 245년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낙랑군의 공격을 받고 다시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동예의 세력 가운데 가장 큰 불내예후(不耐濊侯)는 위나라가 침입하자 투항하였고, 247년에는 위나라에 조공을 바쳐 불내예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읍락민 사이에 섞여 있어 뚜렷이 구분되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통치력이 미약하였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된 뒤부터 다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광개토왕 대에 대부분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농업을 주로 하였으며, 마포(麻布)와 양잠(養蠶) 기술이 발달하였고, 풀솜(명주)을 만들기도 하였다. 동예인은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해 농사의 풍흉을 예고하였고, 매년 10월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음식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제천행사를 행하였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특산물로는 반어피(班魚皮)·표범가죽·과하마(果下馬)·단궁(檀弓) 등이 알려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