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와 콘란트 아데나워
- 최초 등록일
- 2013.11.04
- 최종 저작일
- 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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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빌리 브란트(1913-1992)의 본명은 헤베르트 에른스트 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이며 독일의 정치가 빌리 브란트는 1913년 독일 뤼벡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16살 때 사회 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좌익 정당에 가입한 브란트는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으나 1930년 독일 사민당(SPD)에 가입해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펼치며,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노르웨이로 망명해, 이 때부터 안전상의 이유로 빌리 브란트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노르웨이에서 반 나찌, 반정부 운동을 펼쳤으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브란트는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반나찌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브란트는 기자 명의로 독일로 귀국하였고 1948년 그는 독일 국적을 다시 회복하였다.
<중 략>
아데나워 총리는 1948년 사회민주당 쿨트 시마하 후보와 경쟁을 벌인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연합군 진영의 비호를 받는다고 비난하는 연설로 독일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국민들의 인기를 산 아데나워는 총리로 당선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은 6백 93만표, 기독교민주연합은 7백 36만표를 얻었고, 투표율은 78.8%였다. 수상이 된 아데나워 수상은 자신의 호적수인 쿠르트 슈마허의 독일 사민당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에 반대했으며, 주택건설, 상업중심의 산업육성, 서방세력과의 경제 공동체 구성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아데나워는 미국과 유럽의 주요정치가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대처하며 현실적으로 정치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프랑스에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독일의 미래가 프랑스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과 각별한 사이로 지내며 그의 협력을 얻어 사회적인 안정을 확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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