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작품
- 최초 등록일
- 2013.10.23
- 최종 저작일
- 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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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노계 박인로의 경제적 배경
3. 노계 문학 활동의 특징
4. 가사 속에 담긴 노계의 삶과 의식
5.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박인로는 조선 중기 때의 문인이자 무인(武人). 본관은 밀양.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盧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영양 도천리(永陽 道川里: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군 북안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조는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라고 하나 너무 세대가 멀어 제43대손이 되는 진록(晉綠)으로 중조(中祖)를 삼았다.
그의 82세의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전반생(前半生)이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면, 후반생(後半生)은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했던 선비요, 문인 가객(歌客)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이미 13세에 〈대승음(戴勝吟)〉이라는 한시 칠언절구를 지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동래 · 울산 · 경주지방을 비롯하여 영양군도 잇따라 함락되므로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38세 때는 좌절도사(左節度使)인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수군(水軍)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중 략>
'풍우가 몰아치는 아침 저녁'에 썩은 짚으로 땔감 삼아 죽을 끓여 겨우 요기를 하는 '누항'의 누추하고 허기진 삶, 이러한 세계는 「사제곡」에서 노닐던 한음의 세계와 대조적이다. 그러다 보니 '안빈일념'도 자기와 어긋나는 것 같고, 외로움까지 느끼게 된다. '당위와 현실의 거리'가 극대화 된 것이다. 또한 박인로가 소를 빌리러 갔다가 허탕을 피고 오는 대목은 박인로의 문학 중 가장 개성 있는 부분이다. 이 대목은 가난한 향반인 박인로의 궁핍한 삶을 사실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상 생활의 언사를 대폭 받아들여 자기의 고민을 절실하게 묘사한 것'으로 높이 평가 받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비통한 일이라기보다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농사를 지어 생계를 잇는 길조차 차단되어 버린 자기 모습은 '허당반벽에 슬듸업시 걸려'있는 농기구와 같다는 생각 끝에 그는 그동안 꿈꾸어 왔던 '강호'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강호'는 속세와 절연된 곳 같으면서도 '충효'를 포함한 오륜이 중시되는 사회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