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공민왕에 관한 고찰 리포트
- 최초 등록일
- 2013.10.22
- 최종 저작일
- 2013.04
- 2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000원2,100원
소개글
고려시대 공민왕에 관한 고찰 리포트 입니다.
목차
1. 공민왕
2. 생애
3. 사진 및 그림 자료
본문내용
- 공민왕 -
고려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다
국적/왕조 : 고려
재위기간 : 1351년∼1374년
본명 : 전
별칭 : 초명 기,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
활동분야 : 정치, 미술, 서예
[출처] 공민왕 [恭愍王 ] | 네이버 백과사전
고려시대 왕 중에서 태조 왕건 다음으로 잘 알려진 왕이 제31대 왕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일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정의하면, 개혁군주이다.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 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부인 인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의 등용 등 여러 가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왕이기도 하다.
<중 략>
그리하여 공민왕은 자신의 심복에 가까운 대신(大臣)이라도 그 권세가 커지면 제거하고 말았다.30) 공민왕이 5도도사심관의 부활을 거절한 것은 신돈의 세력화에 의혹을 제기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기현(奇顯)·최사원(崔思遠) 등이 복심이 되고 이춘부(李春富)·김란(金蘭) 등이 우익이 되어 신돈의 당파가 조정에 가득 차게 되자 왕도 스스로 불안해 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점이 공민왕과 신돈의 협력관계가 갖는 한계였고, 신돈 정권이 갖는 한계였다.
이처럼 공민왕과 신돈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직면하여 이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을 키우는 것과 관련하여 서로 입장을 달리하였다. 신돈이 정치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공민왕이 의혹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양자의 이러한 입장 차이는 머지않아 기득권 세력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김원명의 동생이자 태후의 외척인 김속명이31) 당시 선부의랑(選部議郞)을 지낸 이인(李靭)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투고를 가지고 공민왕에게 신돈의 모반을 거론한 것이다. 공민왕은 이를 계기로 마침내 신돈과 그 추종세력을 일거에 제거하였다.32) 그리하여 신돈은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죽임을 당하였고, 그 추종세력들도 대부분 죽거나 유배되었다. 기득권 세력의 폐해를 바로잡으려던 신돈이 좌절을 겪은 것이다. 이때가 공민왕 20년 7월의 일이었다.
참고 자료
http://blog.naver.com/youltae?Redirect=Log&logNo=20161251885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2725
http://blog.daum.net/biocode/1753
http://dankoon2001.blog.me/6012065445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3119&mobile&categoryId=1634
http://blog.naver.com/oaoa?Redirect=Log&logNo=15529912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년 2월 25일, 6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