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레포트 / 연산군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13.08.22
- 최종 저작일
- 2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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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연산군일기』를 통해 보는 연산군 – 왜곡된 모습과 그 영향
2. 시대적 맥락으로 보는 연산군
3. 맺음말 – 연산군의 시대가 주는 교훈과 그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미치광이 왕 속에 파묻혀진 연산군
우리가 기억하는 조선시대 왕 중 ‘가장 히스테리컬한 왕’은 누구일까? 아마 대부분의 왕들과 달리 ‘군’이라는 묘호가 붙은 광해군과 연산군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광해군은 최근 중립외교로 재조명을 받고 있는데 반해, 연산군의 이미지는 음탕하고 잔인한 폭군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연산군은 12년이라는 길지 않은 즉위 기간 동안 두 번의 사화를 일으키고, 난폭하고 잔인한 정치를 하다가 결국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그의 시대를 다룬 기록은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불렸으며, 종묘에서 배제되었고 격식을 갖춘 ‘능’이 아닌 초라한 ‘묘’에 안치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은 연산군의 부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는 중종 때 쓰여진 『연산군일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연산군의 지금과 같은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의심쩍은 부분들이 적지 않다. 연산군이 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뒤에 편찬된 『연산군일기』는 완벽하게 승리자의 입장에서 적힌 책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연산군일기』속에 나타나는 연산군의 모습 중 왜곡의 가능성을 보이는 부분을 분석하고, 이러한 시각이 현재 연산군의 이미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는 기존의 연산군의 모습이 실제 연산군과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 깨닫고, 미치광이 왕으로 표현되는 연산군을 시대적인 맥락에서 재조명하려 한다.
<중 략>
이러한 과정에서 첫 번째 숙청,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삼사는 일단 움츠러들었다. 왕권국가의 원리상 왕이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 잘못된 목표가 아니기에, 이 무오사화까지 통치는 정당한 정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부터 시작되었다. 국왕은 삼사를 제압해 확보한 왕권을 국정 개혁이나 경제 발전 같은 건설적인 분야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기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집중했다. 이처럼 왕이 자신의 강화된 왕권을 불필요한 곳에 낭비하면서 삼사의 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신들도 이러한 삼사의 주장에 동의하고 연산군의 각성을 촉구했다. 삼사와 대신 모두에게 고립된 왕은 이를 정당한 비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번째 숙청,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러한 폭정의 과정은 결국 반정을 끌어들이고 위에서 살펴본 기록에의 왜곡, 현재까지의 파편화된 모습을 낳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