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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8.06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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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명칭
Ⅲ.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상징성
Ⅳ.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선행연구
Ⅴ.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근본원인
Ⅵ.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미군정 강경대응
Ⅶ.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다랑쉬굴
Ⅷ.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명예회복위원회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진상조사보고서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부분은 주로 ‘잔여무장대의 궤멸’에 초점을 두고 서술돼 있다. 잔여무장대의 소탕에 이렇게 많은 부분이 할애될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주한미대사관은 1950년 8월 13일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신부가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하자 제주도 상황을 직접 시찰하기 위해 해군무관 존 세이퍼트(John P. Seifert), 3등 서기관 도날드 맥도날드(Donald S. Macdonald), 부영사 필립 로우(Philip C. Rowe) 등으로 팀을 구성해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국장, 해병대 지휘관, 경찰 간부들을 만나 제주도 상황을 파악해 대사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대사관은 향후 제주도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면서 한국 당국도 그렇게 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경찰과 관련해 대 게릴라 전투 경험이 있는 1명의 미고문관이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 고문관은 소수의 무장 게릴라와 오름에 있는 지지자들을 소탕하고 향후 게릴라 활동의 재발방지를 위한 일환으로 내륙에 정찰 초소를 세워 공격적인 토벌작전을 즉시 시작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토벌작전과 정찰활동을 위해 전투경찰대대가 창설돼야 하고 보병 및 게릴라 전술훈련을 받아야 하고 해병대를 보다 위급한 본토로 철수시키는게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
<중 략>
Ⅶ.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다랑쉬굴
제주4․3연구소는 다랑쉬굴 발견 이후 구좌읍 일대를 중심으로 희생자의 신원과 사망경위에 대한 광범위한 증언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조사는 파편적인 것이어서 전모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 시기 다랑쉬굴 소식을 접한 제민일보의 4․3특별취재반에 의해 당시 결정적인 증언자 2명의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구좌읍 종달리 민보단 간부 출신으로 다랑쉬굴 토벌현장에 동행했던 오지봉 씨(당시 75세)와 토벌대가 철수한 이후 직접 굴속에 들어가 시신을 정리했다는 종달리 채정옥 씨(당시 67세)였다. 두 사람의 증언은 놀랍도록 일치했고, 시신중에는 동네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시신 일부의 명단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군경토벌대에 의해 질식사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참고 자료
김순태, 제주 4·3민중항쟁 당시의 계엄에 관한 고찰, 민주주의법학연구회, 1998
김종민, 제주 4·3항쟁 : 대규모 민중학살의 진상, 한국역사연구회, 1998
양정심,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제주4·3항쟁에 대한 인식,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양정심, 4.3항쟁과 남로당 제주도당, 수선사학회, 2007
허상수, 국가폭력과 제주4·3항쟁, 한국사회학회, 2004
Chang Hoon Ko, 제주 4,3 항쟁에서의 미국정부의 책임, 한국지방정부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