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 민주화,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 대중화,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 진실규명,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 진상조사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3.08.06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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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원인
Ⅲ.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민주화
Ⅳ.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대중화
Ⅴ.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국방경비법
1. 국방경비법은 제정 공포된 적이 없다
1) 법이 아니다
2) 죄형법정주의에 관한 규정
3) 법률적용의 계속과 차단
2. 군법회의와 관련된 국방경비법 문서의 주요 내용
Ⅵ.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5 10선거
Ⅶ.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진실규명
Ⅷ.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진상조사보고서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제주4.3` 때 벌어진 초토화 작전과 미국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48년 8월 24일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전적으로 미군이 갖고 있었다. 또한 미군은 제주에서 벌어졌던 학살극의 현장에 있었고 배후의 정점에서 작전에 개입했다. 이 같은 사실들은 미군과 초토화 작전을 불가분의 관계로 묶는다.
박명림은 그의 석사학위논문 [제주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에서 미군이 초토화 작전에 개입하게 된 이유로 `상황론`과 `음모론`을 아울러 제시했다.
`상황론`은 당시 정황에 근거한다. 즉 "철수에 앞서 친미반공기지를 구축한다는 미군의 점령목표가 여순사건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고, 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모론`의 요지는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기지로서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박명림은 그 근거로 4.3초기 무장대와 경비대간의 `4․28 평화협상`이 미군정 경찰의 방해로 무산된 점과 1949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 미군이 그리스민주주의군대의 온건한 정전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초토화전술을 구사한 것과의 유사성을 들었다. 일각에서는 "4.3봉기는 오히려 미제국주의가 먼저 민중을 유도하여 민중이 일어나면 되받아치는 작전으로서 계획적이요 의도적인 하나의 민중공격작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음모론의 경우 구체적 근거와 더욱 심화된 연구 성과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아직은 `주장` 단계로 보인다.
<중 략>
Ⅷ.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진상조사보고서
진상조사보고서는 지난 1960년대 이후 그리고 시대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고자 했던 모든 이들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물의 하나이다. 그러나 보고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진상조사보고서의 역사적 의의를 삭감하는 것은 아니다.
‘4․3과 미국’의 부분은 여전히 밝혀내야 할 ‘비밀’들이 많다. 지난 90년 11월 제주도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러 왔던 도널드 그레그 당시 주한미대사는 “미국도 남북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듯 4․3에 대한 제주인의 고통을 씻는데도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안다”며 “한국 및 미국 국내의 연구기관이 발표한 미정부 자료 외에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성과들은 그 이후 국내의 소장 연구자들에 이루어져 온 것이다.
참고 자료
김봉현, 김민주 /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 자료집, 문우사. 1963
박명림 / 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정치외교학과, 1989
박찬식 / 4·3연구의 추이와 전망,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 1999
이선교 / 제주 4.3사건의 진상, 현대사포럼, 2008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 제주도 4·3피해조사 보고서, 1997
지만원 / 제주 4 3 반란 사건, 시스템,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