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눈물을 흘리며 정성껏 쓴 레포트 입니다.
목차
1.서론
2.온조설
3.비류설
4.온조설과 비류설의 유사점와 차이점
4.1 온조설과 비류설의 유사점
4.2 온조설과 비류설의 차이점
5.결론
6.참고문헌
본문내용
백제시조에 대해서 온조 이외에 비류라는 온조의 형이 나오는데 그 온조의 형인 비류가 실제 백제의 시조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계기로 백제 시조인 ‘온조설과 비류설’에 대해 더 알고자 하여 ‘백제의 건국신화’를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 두 계통의 백제 시조 설화를 비교하고 일치하는 내용을 통해 어떤 시조 설화가 더 신빙성이 있는가를 알고자 하였다.
백제의 시조는 東明說, 溫祚說, 沸流說, 仇台說, 都慕說 등 각기 다른 전승이 전해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이야기가 논의 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의 건국집단을 “扶餘系 高句麗 流移民”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파악했기 때문에 부여와 고구려를 굳이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에 의해 백제 왕실교대론이 제기되어 백제의 건국집단을 沸流系와 溫祚系로 나누고, 비류를 優台와, 온조를 朱蒙과 각각 연결시킴으로서 다시금 이 문제가 쟁점화 되었다. 즉 고구려와의 친연성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부여의 계승성을 강조할 것인가. 그리고 비류와 온조의 문화적 기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대두된 것이다. 더 나아가 『삼국사기』 편찬 당시 참고한 사서들에서 이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비류 시조전승이 온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비류 시조전승의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인들 스스로 비류에 대한 전승을 고이 간직했기 때문에 백제 멸망 후 많은 사료들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겨지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도 온조가 첫째가 아닌 둘째로, 남하의 주동세력이 아닌 보조자로 기록되고 있다. 건국신화의 경우 建國主의 神聖性을 강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제 신화의 경우 그러한 부분이 많이 탈색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러한 궁금증에서 출발하여 사료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백제의 건국시조에 대한 사료로는 『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 1, 시조 온조왕 즉위조와 『삼국유사』 권2, 기이 2, 남부여조. 그리고 『주서』 권49, 열전 41, 異域 上, 백제전 등의 중국사서가 있다. 또한 『속일본기』 권40, 환무천황 9년 가을 7월조에도 ‘백제 太祖가 都慕大王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 기록에서는 백제의 始祖에 대해서 東明說, 溫祚說, 沸流說, 仇台說, 都慕說 등 각기 다른 傳承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백제 건국시조와 관련해 가장 주목되는 것은『삼국사기』 始祖 溫祚王條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백제에서만 시조 즉위조에 유독 두 명의 시조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지, 어떻게 백제건국신화로 정착된 것인지 살펴봐야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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