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 경험주의 기학
- 최초 등록일
- 2013.06.13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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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최한기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2.경험주의와 기학
3.기학의 딜레마
본문내용
1.최한기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배경
최한기는 19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기존의 동서양의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한 수많은 연구 저서를 내고 한국의 근대사상이 성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실학자이다. 19세기는 17세기 이후 조금씩 밀려오던 서세동점(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이라는 조류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큰 파고를 만들어 내던 시기였다.
19세기 서세동점을 인식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한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 박규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최한기는 ‘기학(氣學)’이라는 학문 체계를 통해서 동서양의 학적 만남을 꾀했고 이를 통해 조선이 처해있는 난국을 헤쳐나갈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생애
최한기는 1803년 최치현과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삭령이다. 개성 출신이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본가와 외가는 여러 대에 걸쳐 개성에서 거주한 집안이었고, 최한기 또한 개성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한다. 자는 지로이며 호는 혜강, 패동, 명남루 등을 사용했다. 최한기 집안은 조선전기 대학자인 최항, 1409~1474)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직접적인 혈손은 아니다. 직계로 보면, 8대조인 최의정이 음직으로 감찰직을 지냈다고는 하나, 증조부 최지숭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문무과는 물론이고 생원진사시에도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이었다.
부친인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잘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일찍이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 응시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개성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문명(文名)이었다. 최치현과 장인인 한경리는 사위와 장인 관계를 넘어 제자와 스승관계였다. 그러나 부친인 최치현은 최한기가 10세 때인 1812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부친의 사망 당시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이미 입양된 상태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