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 허균에 대해, 그의 일대기
- 최초 등록일
- 2013.06.06
- 최종 저작일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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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허균
2. 성장기(25세까지)
3. 26세(2월 문과에 급제)~39세
4. 40세(광해군 즉위)~48세
5. 49세 1월(흉격 사건)~50세 (8월 24일 사형)
본문내용
허균은 명문 집안에서 자유분방한 천성과 높은 학문적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 확실히 그에게는 거리낌을 모르는 천재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는 당시의 소외 받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였다. 특히 그는 후실의 아들이라 서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자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당시에 배척받았던 불교를 받들었다. 기생들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왜 서자들에게 동정적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이라 인정되고 있는 “홍길동전”은 그의 서자들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내어 주고 있으며 그의 글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다. 그의 타고난 성격과 주변의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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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과 광해군의 악연은 선조 때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것이었다. 선조는 아들이 14명이나 있었지만 영창대군 하나만 두 번째 왕비인 인목대비(김제남의 딸)에게서 난 적자였고 나머지는 모두 서자였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이 급격해지자 장자 임해군을 대신해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 되었다. 광해는 그만큼 총명하고 효성스러웠다. 문제는 선조의 마음이 점차 광해에게서 멀어져 갔고 거기다 1606년, 선조 39년에 인목대비에게서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이었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고 싶었지만 1608년에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조는 허균의 형 허성을 비롯한 가장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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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에게 의혹이 쏠리던 사항들(흉격 사건과 기준격의 상소 내용 등)이 그 남대문 흉방 사건 및 그에 선행되어 일어난 사건들(민심 소란 등)과 얽혀 모두 허균과 그 일당의 소행인 것으로 결론지어져 갔다. 이미 허균의 존재를 화근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린 이이첨과 허균을 제거하고 싶어 하던 다른 대신들이 광해에게 허균을 대역죄로 처형할 것을 재촉했고, 광해는 그런 대세에 따라 허균의 처형을 허락하고 만다. 드디어 8월 24일 허균은 처형을 당했다. 허균을 처형한 과정이 절차에 합당치 않았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이이첨과 유희분이 힘겨루기를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