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3.05.20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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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무령왕의 업적
2. 무령왕릉의 위치, 크기
3. 무령왕릉의 유물
4. 무령왕릉의 역사적 의의
5. 참고자료
본문내용
백제 25대 왕으로 이름은 사마·융·여륭이며, 동성왕(재위479-501년)의 둘째 아들로 왕은 키가 8척에 얼굴이 그림처럼 잘 생겼다. 혹은 동생인 혼지·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도 한다. 마음이 인자하고 덕이 많아서 백성들이 그를 잘 따랐다.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의하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501년 부왕(父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502년(무령왕 2)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가를 한솔 해명에게 명하여 치게 하니 백가가 항복하였다.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금강 입구)에 던졌다. 같은 해 11월에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명으로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였다.
<중 략>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 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중 략>
삼국 시대 무덤의 대부분이 그 주인을 알 수 없는 것과 달리 무령왕릉은 무덤에 묻힌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데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사실은 무령왕릉이 백제 왕릉으로 고고학 및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은 물론, 삼국 시대 무덤들의 연대를 찾아보는 데에도 그 기준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지석 이 이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참고 자료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