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빙글리
- 최초 등록일
- 2013.04.29
- 최종 저작일
- 20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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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초기생애와 활동
2. 개혁의 시작
3. 취리히 종교개혁의 승리
4. 쯔빙글리의 논제들
5. 논쟁
6. 루터와의 관계
7. 공헌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그늘에 서있던 그는 종교개혁의 셋째 인물, 혹은 심지어 잊혀진 종교개혁자라고 불리운다. 그는 스위스에 종교개혁의 개척자이며 힘과 독창성을 지닌 종교개혁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로서 쯔빙글리는 개혁파의 특징 가운데 많은 것을 체계화시켰다. 그는 강해설교를 귀중하게 여겼으며, 교육목회를 설정하였고,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급진적인 예전의 개혁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또한 평신도의 훈련의 역할을 발전시켰으며, 개혁파 예정론가 성례론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한 쯔빙글리의 논쟁과 개혁을 알아보고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던 루터와의 관계 또한 이 글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초기생애와 활동
쯔빙글리는 마을 행정관이었던 자유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인 마르가레테 마일리는 투르가우에 있는 피싱겐 대수도원장의 누이였고, 쯔빙글리의 아저씨인 바르톨로메우스 쯔빙글리는 빌트하우스의 사제였으며 훗날 베센의 부제가 되었다. 쯔빙글리는 베센에 있는 학교에 다녔으며, 그뒤 바젤(1494)과 베른(1496)에서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스승 하인리히 뵐플린은 그에게 고전에 대한 열정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들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관심을 가져 수도원에 들어오도록 그를 부추겼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저씨로부터 설득당한 그는 빈(1498)과 바젤(1502)에서 공부했으며, 1504년 바젤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서적을 읽었고, 선생이자 개혁가인 토마스 비텐바흐의 강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06년 사제가 되어 글라루스로 간 그는 좋은 목자로 평판을 얻었고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교회교부들에 관해 폭넓게 독서했다. 또한 르네상스 운동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에라스무스와의 서신교환을 중시했다. 스위스 군대의 종군사제로 복무한 그는 용병제도를 반대했다. 그가 취한 이러한 입장은 글라루스 사람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1516년 그는 새로운 임무를 띠고 아인시델른으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많은 순례자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와, 수도원에서 좋은 시설을 이용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동시에 얻었다. 쯔빙글리는 훗날 자신이 성서를 복음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아인시델른으로 옮겨가게 된 시기부터였다고 기술했다. 글라루스에서의 어려움은 그에게 학문적인 의미 이상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참고 자료
없음